여섯 번째 항암은 쉬었습니다. 대신 프루스트를 읽었습니다. 새하얀 산사나무 꽃 아래서요. '그때 나는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는 프루스트의 구절에 기대어 그때를 기억합니다. 당신의 삶이 항상 '행복한 오후의 연속'이기만을 소망하면서요.
저녁 무렵 이자르강 산책길. 요즘은 저녁 늦도록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운 샘.
이번 주는 항암을 못했어요. 여섯 번째 항암이었는데요. 항암센터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항암 전날이었어요. 그날 아침 일찍 병원에서 피검사를 하고 돌아온 직후였어요. 검사 결과 백혈구 수치가 낮아서 항암을 한 주 미루자고 하네요. 그럴 리가! 백혈구가 왜! 이유를곰곰 생각해봤죠. 평소와 다른 게 뭐가 있었지? 그러자 하루 전날 PET CT 검사를 한 게 생각났어요.그 검사가 원인일 수도 있냐고 물었더니 꼭 그런 건 아니고 자주 있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래요. 검색해 보니 방사선 노출도 이유가 될 수 있다네요. 이 검사의 조영제가 방사선 물질이라 하니 그쪽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맘 편히 쉬었답니다. PET CT 결과도 나왔어요. 흉골이라고불리는 목 아래 가슴뼈 전이는 처음과 그대로래요.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았으니천만다행이죠. 저는 정말 운이 좋답니다.
수요일엔 뭘 했냐고요? 항암 대신 오전과 오후 두 번 산책을 했어요. 삼시 세 끼도 느긋하게 챙겨 먹고요. 요즘은 날씨가 더워 늦은 오후나 저녁 무렵 산책을 선호한답니다. 오후 5시부터 저녁 7시 사이에요. 이자르 강변의 오솔길 산책로는 나무들이 울창하고 그늘이 져서 시원하거든요. 이번 주는 뮌헨도 날씨가 장난이 아니에요. 주말까지 무려 나흘 동안 30도가 넘거든요. 어제는 시어머니 두 분과 통화를 했답니다. 레겐스부르크의 힐더가드 어머니는 집에 에어컨을 켜셨고, 오전에골프를 치는것도 힘드셨대요. 슈탄베르크의 카타리나 어머니도 정남향인 야외 정원 식탁에서 며칠째 식사를 못하시고, 아침저녁으로 슈탄베르크 호수에서 수영으로 더위를 견디시나 봐요. 유월에 30도가 넘는 무더위라니요.날씨도 제 정신이 아닌가 봐요.
그날은 항암 쉬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을 끝냈어요. 저녁 무렵 책을 들고 걷다가 산책로 벤치에 앉아 책걸이를 했죠. 모기 한 마리와 싸워가면서요. 독일에는 모기가 거의 없는데 강과 숲과 정원에는 있답니다. 제가 모기나 개미 같은 벌레에 약하잖아요. 저만 보면 물 만난 고기처럼 난리를 치니까요. 물리면 또 금방 부어요. 집에 와서 한국에서 사 온 패치를 붙였죠. 가려움이 금방 사라지거든요. 저 같은 체질엔 패치가 답이란 걸 이번 봄에 한국에 가서 알았죠. 그때가 사월이었는데 저녁에 공원을 걸으면 모기가 있더라고요. 많지도 않고 딱 한 마리요. 항암 때는 물리는 것도 조심해야 한대요. 가려워서 긁게 되면 상처 부위가 붓고 염증이 생기기 쉽거든요. 여름이 와도 한국에서 챙겨 온 패치가 있어 든든합니다. 산책 때도 넣어가려고요. 물병과 책과 한 세트로요.
저런 길과 저런 돌!
어제는 두 번째 백신도 맞았답니다. (항암 중이라 괜찮은지 물었더니 괜찮대요.) 주치의에게 가서 비온테크 Biontech(한국명 화이자)를 맞고 왔어요. 어제는 괜찮았고, 오늘 아침에도 주사 맞은 부위가 묵직한 것 빼고는 괜찮네요. 열이 나거나 몸살기는 없고요. 그래도 조심하는 게 낫겠다 싶어 아침을 먹고는 침대에서 쉬었어요. 너무 더우니 한동안 한낮의 외출은 삼가야 할 거 같고요. 언니는 새벽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부지런히 밥하고, 청소하고, 장을 본답니다. 매일 유튜브로 레시피를 검색하고요. 닭은 죽이나 데리야끼 식으로, 소고기는 얇게 썰어 올리브 오일과 로즈메리에 재서 팬에 살짝 구워주고요. 배추로 끓여주는 된장국도 맛있어요. 얼마 전에는 놀랍게도 배추를 사 와서 김치까지 담갔어요. 맛이요? 먹을 만했어요. 언니의 지론은 간단합니다. 한국 김치는 익으면 무조건 맛있다! 제가 최고로 꼽는 언니의 레시피는 전과 김밥. 심플하고 깔끔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엄마와 형부가 해주는 밥만 먹던 사람이었는데 정말 놀라운 변신 아닌가요.
주말부터 저는 언니가 조카를 위해 하는 요가 수업에도 동참할까 해요. 조카를 보니 일주일에 한 번씩 딱 한 달을 했는데 라인이 살아나고 있거든요. 원래 건강한 체질인 데다 하체도 튼튼한 편인 조카는 다이어트를 밥 먹듯 했는데요. 그러다 요가에 재미를 붙였는지 이번 주부터 주 2회를 하고 싶다네요. 기세로만 봐서는 주 3회까지달릴 지도 몰라요. 저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되죠. 재수술한 지 석 달이 지났고, 수술 부위도 잘 아물었으니 무리만안 하면 제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요즘은 집에서저녁마다 친구가 보내준 돌베개를 따뜻하게 데워서 가슴뼈 찜질도 한답니다. 자가 열치료라 할까요. 덕분에 오늘 아침에는 체온이 조금 올라갔네요. 백신을 맞은 후라서 어떤 게 진짜 이유인지는 모르겠고요. 산책할 때는 강가에 데워진 편편한 돌 위에도 앉아보려 해요. 싱가포르에서 시험관을 할 때 1년 동안 저녁 산책 때마다 하루 종일 달궈진 돌 위에 앉아 동백처럼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석양을 보던 게 생각나서요. 지나고 보니 그게 제 몸을 데워준 일등 공신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땐 아무것도 모르고 한 일이었고요.
샘.
프루스트 덕분에 저는 올해 산사나무를 알았습니다. 독일에 와서 몇 년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눈에 들어온 나무랍니다. 이름을 알자 고개를 들면 눈에 보이는 게 산사나무뿐이네요. 관심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반대도 그렇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딱총나무였음!) 콩브레의 생틸레르 종탑에 대한 묘사는 또 어떻고요. '날씨는 화창하고 주위도 고요해서,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와도 낮의 고요를 깨트리기는커녕, 충만한 고요함'뿐이라네요.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산책길에서 모퉁이를 돌자마자 마부가 갑자기 멀다고 느꼈던 종탑 바로 아래 그들 가족을 내려놓는 상황도 이렇게썼습니다. '종탑이 얼마나 거칠게 마차를 향해 내던져졌는지, 거의 성당 정문에 부딪칠 뻔했다'고요. 이런 대목에서는 책을 가만히 가슴에 안고 눈을 감을 수밖에요. 입으로는다음과 같은 문장을 읊조리면서요. '그때 나는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 저도 그랬습니다, 샘. 유월도 절반을 지나고 있네요. 프루스트의 말을 빌려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샘의 삶이 항상 '행복한 오후의 연속'이기만을 소망한다고요.
프루스트의 책에 나오는 산사나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산사나무꽃이 아니었다!!!(완벽하게 착각한 이 나무의 이름은 '딱총나무'. 흑흑!!)
산사나무 Weißdorn*
내가 산사나무를 좋아하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이 '성모성월'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나무는 그렇게도 성스럽지만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성당 안에 있었고, 더 나아가 제단 위에까지 놓여 있어 분리될 수 없는 채로 미사 의식에 참여했으며, 촛대 외 성스러운 집기 들 사이를 뻗으며 수평으로 엮여 축일 장식물이 되었고, 또 가지는 잎의 꽃 줄 장식으로 더욱 아름답게 꾸며져 잎 위에는 눈부시게 하얗고 작은 꽃봉오리 다발들이 마치 신부의 늘어진 옷자락처럼 수없이 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지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남몰래 바라보았는데, 그 화려한 장식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잎이 들쭉날쭉한 모양으로 패었으면서도 하얀 꽃봉오리라는 최상의 장식이 덧붙어, 그 장식을 민중의 기쁨과 신비주의적인 엄숙함에 동시에 합당하게 만드는 자연 그 자체인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더 위쪽에는 산사 꽃부리가 무심하고도 우아한 자태로 여기저기 열려 있었는데, 마지막 손질로 꽃부리 전체를 안개처럼 뽀얗게 만드는 가느다란 거미줄 같은 꽃 수술 다발을 나른하게 붙잡고 있었다.
성당에서 나가려고 제단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나는 갑자기 산사나무 꽃에서 아몬드의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산사 꽃에서도 아주 작은 금빛 부분에 눈길이 쏠렸는데, 마치 프랑지판 과자의 맛이 갈색으로 굽은 껍질 아래, 또는 뱅퇴유 양 빰의 맛이 주근깨 아래 숨어 있듯, 산사나무 향기가 그 아래 숨겨진 것 같았다.
분홍색 산사 꽃
물론 하얀 산사 꽃 앞에 섰을 때에도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분홍색 산사 꽃 앞에서 더 많은 황홀감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꽃들에게서 축제 분위기가 풍기는 것이 인공적 기교가 아닌 자연에 의해서였기 때문이다. 그 자연이 임시 제단을 꾸미며, 작은 관목을 지나칠 정도로 다정하고도 촌스러운 퐁파두르 부인식 화려함을 지닌 분홍 꽃들로 넘쳐나게 하면서, 시골 가게 여인네의 순박함과 더불어 즉흥적으로 축제 분위기를 나타냈던 것이다.
가지 꼭대기에는 마치 레이스 종이로 싼 수많은 작은 화분에 감추어져 대축일이면 제단 위에서 그 가느다랗게 접힌 종이가 반짝거리는 장미나무처럼, 더 희미한 빛깔의 꽃봉오리로 무수히 넘쳐 났고, 봉우리가 열릴 때는 분홍 대리석 술잔 바닥같이 붉은 핓빛이 살짝 보였는데, 마치 산사나무가 싹트고 꽃 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분홍색일 수밖에 없다는 듯이, 활짝 핀 꽃보다 더 산사꽃의 특이하고도 매력적인 본질을 드러냈다.
마치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축일 옷차림을 한 아가씨처럼, 울타리 속에 섞이긴 했지만 울타리와는 다른 이 가톨릭적이고 감미로운 관목은 성모성월을 위한 준비를 다 마치고 벌써 거기 참여하고 있다는 듯이, 싱싱한 분홍빛 옷차림으로 미소를 띠며 반짝였다.
햇살이 반짝이는 이자르강 오솔길 산책. 아래 가운데는 독일 여성 패션 월간지 <Brigitte 브리기테> .
P.S.
*부제는 임의로 붙인 것임. 문단도 임의로 나누었음.
**초록 부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역, 민음사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