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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Aug 31. 202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책 속의 주인공은 여행지에서 생루와 알베르틴이라는 새로운 우정과 두 번째 사랑을  얻었고, 나는 항암이라는 현실 공간에서 이어리스 라는 좋은 대화 친구를 얻었다.



병원 뒤뜰의 벤치.



꽃피는 병원 뒤뜰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책을 읽던 항암의 시간들이 있었다.  여름날들은 어디로 을까. 팔월의 끝날 뮌헨에는 비가 다. 항암을 마치고 나오자 잠시 해도 나왔다. 팔월의 마지막 날에 열네 번째 항암을 마칠 수 어 감사하다. 앞으로 남은 건 네 번! 초록이 든 병원 뒤뜰 나무 벤치에는 햇살 대신 빗방울만 가득했다. 한가하게 샌드위치를 먹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소환할 날들이 까. 너무 일찍 와버린 가을. 독일의 가을은 축축하고 춥다. 위로가 되는 건 미리 보는 일기예보. 구월에는 해도 자주 나오고 기온도 20도를 넘을 예정이란다. 로또만큼 귀한 독일의 가을볕을 기대한다. 구월부터는 매주 수요일에 <뮌헨에서 라디오>라는 유튜브 방송에서 내 브런치 글을 한 편씩 낭송하고 싶다고 메일이 왔다. 영광이라고 답했다.



집의 책과 소품들(위). 휴양지에서 찍은소품들(아래).



발베크의 소녀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년 후 질베르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그라들었을 때, 난 할머니와 함께 발베크로 떠났다.' 그렇게 떠난 여행지에서 주인공은 인생의 우정을 나눌 친구 와 두 번째 사랑, 알베르틴을 만난다.



나는 그저 혼자서 그랜드 호텔 앞을 서성이며 할머니를 보러 시간만을 기다렸는데, 그때 방파제 거의 끝 쪽에서 특이한 얼룩 하나가 움직이는 듯, 그 모습이나 행동이 발베크에서 늘 보아 오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대여섯 소녀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 이 낯선 소녀들 가운데 한 소녀는 손으로 자전거를 앞으로 밀고, 또 다른 두 명은 골프 '클럽'을 들고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은 발베크의 다른 소녀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는데, 물론 발베크 소녀들 가운데서도 스포츠에 빠진 이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특별한 옷차림을 하지는 않았다.**


소녀들은 제각기 완전히 다른 유형이었지만,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아주 조금 전부터야 바라보았을 뿐인 데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으므로, 그때까지 나는 소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개별화하지 못했다. 다만 코가 곧고 피부가 갈색인 소녀만이 그 가운데서도 르네상스 시기 어느 그림에 나오는 아라비아 풍 동방박사마냥 다른 소녀들과 대조를 이루었는데 이 소녀를 제외하고는, 한 소녀는 강하고 고집 세지만 웃음기 있는 눈으로, 또 다른 소녀는 제라늄을 연상시키는 구릿빛이 감도는 분홍빛 두 뺨으로만 인식되었다.



휴양지에서 찍은 호텔 창 안의 풍경.



알베르틴, 두 번째 사랑


발베크에서 주인공에게 두 번째 사랑이 찾아온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건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그 자체라고 설파했던 샤를뤼스의 말은 무조건 옳다.



알베르틴을 본 순간부터 나는 매일 그녀에 대해 수없이 생각했으며, 내가 그녀라고 부르는 인물과 더불어 끊임없이 내적 대화를 이어 가며 그녀로 하여금 질문하고 답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했고, 시시각각 내 마음에 연이어 나타나는 상상의 알베르틴이라는 그 무한한 계열체 안에서, 해변에서 얼핏 본 실제 알베르틴은, 마치 어느 역을 '창조한' 스타 여배우가 긴 공연 일정 중 처음 며칠만 출연하듯이, 처음에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얼굴을 살짝 옆에서 바라보면, 하얀 밀랍처럼 윤기 없던 두 뺨이 너무도 투명한 분홍빛으로 보여 그 뺨에 키스하고 싶고 빠져나가는 다른 빛깔도 붙잡고 싶었다. (...) 아무 생각 없이 작은 갈색 점이 점점이 난 그녀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때로 거기에는 다른 점보다 더 푸른 두 반점이 떠다녔는데, 방울새의 알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갈색 원석을 두 곳에서만 닦아 세공한 유광 마노인 양 하늘색 나비의 투명한 두 날개처럼 반짝거렸으며, 눈 속 상은 거울이 되어 몸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우리를 영혼에 더 가까워지게 하는 듯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호숫가에서 찍은 비에 젖은 꽃.



꽃핀 소녀들의 향기


꽃핀 소녀들의 향기는 어떤 향일까. 어린 장미꽃향이라고 주인공은 말한다. 사람 사이에도 향이 있다면 민트나 라벤더 같은 향이면 좋겠다. 상큼하면서도 거나 질리지는 않게.



소녀들 사이에 드러누워 있을 때 느끼는 충일감은, 인간 말의 빈약함과 부족함을 무한히 넘어서서 내 부동성과 침묵을 행복의 물결로 넘쳐흐르게 했고, 그 찰랑거리는 물결은 이 어린 장미꽃들 발밑에서 잦아들었다.


소녀들이 말할 때면,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녀들을 바라볼 때와 같은 기쁨을 느꼈고, 그녀들 각각의 목소리에서 선명하게 채색된 그림 한 폭을 발견하는 기쁨도 느꼈다. 나는 마음껏 소녀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소녀들에 대해 정치가나 배우들이 대중에게 갖는 사랑, 말하자면 일종의 집단적인 사랑을 바쳤다.


내가 알베르틴과 그 친구들과 맺었던 관계에서 그 근원에 있던 참된 기쁨은, 억지로 익힌 과일이나 햇볕에 여물지 않은 포도 등 어떤 인공적인 기술로도 주지 못하는 그런 향기를 남겼다. 소녀들이 한순간 내게 초자연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들과 가졌던 지극히 평범한 관계에 어떤 경이로움을 부여했고,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전혀 평범한 관계가 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호숫가의 카페를 장식하는 커튼에는 사슴들 무리.



열네 번째  항암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작은 병실에서 60대로 보이는 독일 여자분과 둘이서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이어리스 Iris. 우리 발음으로는 아이리스. 몸매가 아담하고 그 나이 때 독일 여성 치고는 매우 날씬했다. 몸에 군살이라고는 없고, 옅은 갈색 긴 단발이 잘 어울렸다. 물론 나처럼 가발이었다. 묻기 전에는 몰랐지만. 일단 가발에 대한 정보부터 항암 후 신청할 수 있는 3주간 재활 클리닉에 대한 정보를 거쳐 휴대폰 번호까지 교환하고 같이 트람을 타고 돌아왔다. 밝은 성격이라 더더욱 그녀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3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다음 주에는 피검사를 마치고 같이 차를 마시기로 했다. 항암을 화요일로 바꾼 덕분이었다. 그녀도 새벽 일찍 잠이 깨면 책을 읽는다고 했다.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하다.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권에 출사표를 던졌는. 팔월이 다 가기 전..



카타리나 할머니의 정원에서.



*소제목은 임의로 붙인 것임.

**초록 부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민음사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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