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뮌헨의 마리 Dec 06. 202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게르망트 쪽으로 1


약차를 주문하러 뮌헨 근교의 독일인 의사가 운영하는 중국전통요법센터를 갈 때마다 황금빛 차를 한 잔 마셨다. 그게 강황차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 차에도 각각의 '이름'이 있어, 이름을 알고 마시는 차는 맛도 색도 향도 달라 보인다. 이름이 주는 무게 같은 것.


내가 다니는 중국전통요법센터(TZM)에서 내주는 강황차.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에는 특정한 이름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환기시키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이해가 쉽다는 뜻은 아니고. 일단 문장이 길다. 읽다 보면 점점 이해가 안 되난감한 현실과 맞닥거린다. 나는 확신한다. 당신도 예외는 아닐 라고. 그래 주면 고맙겠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은 게르망트 공작 부인. 


'이름'이, 우리가 그 이름에 불어넣는 낯선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현실의 장소를 가리켜 그 미지의 것과 현실의 장소를 확인해야 하는 나이에 이르면, 우리는 도시가 담을 수는 없지만 그 이름과 분리될 수 없는 영혼을 찾아 떠나야 한다.*


게르망트 부인이 자리에 앉았다. 작위를 동반한 부인의 이름이 그녀라는 물리적 인간에 공작의 영지를 추가로 반사하면서, 게르망트 숲의 싱그러운 황금빛 그늘을 살롱 한복판 그녀가 앉은 의자 쿠션 주위에 감돌게 했다.



중국전통요법센터(TZM) 계단과 실내.



어떤 우연으로 게르망트라는 이름이 페르스피에 양의 결혼식 날 내가 느꼈던 그대로, 그토록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오늘날과는 아주 다른 울림을 자아내면서, 젊은 공작 부인의 부풀린 목장식을 벨벳처럼 만들어 그토록 부드럽고 지나치게 반짝거리며 지나치게 새것인 연보랏빛을 다시 내게 돌려준다면, 또 내가 도저히 꺾을 수 없는 빙카 꽃이 다시 피어난 듯 푸른 미소로 반짝거리는 그녀 눈동자를 돌려준다면, 그 빛깔들은 여전히 나를 황홀하게 할 것이다.


그때 게르망트라는 이름은 산소나 다른 기체를 담은 작은 풍선과도 같아, 내가 만약 그 풍선을 터트려 안에 담겨 있는 걸 나오게만 한다면, 나는 그해의 콩브레 향기를, 바람에 살랑거리는 산사나무 꽃향기가 섞인 그날의 콩브레 향기를, 광장 한 모퉁이에서 비를 알리는 전조인 바람이 차례로 햇살을 날아가게 하고 성당 제의실 붉은 모직 양탄자를 펼쳐 놓고 거의 제라늄 분홍꽃에 가까운 반짝이는 살색으로, 말하자면 환희 속에 그토록 축제에 고귀한 빛을 띠게 하는 바그너풍 부드러움으로 덧칠하던 향기를 호흡할 수 있으리라.



중국전통요법센터(TZM) 입구.



나는 정말로 게르망트 부인을 사랑했다. 내가 신에게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은, 그녀에게 온갖 중상모략을 퍼부어 그녀를 파산하게 하고 실추시킨 뒤 나로부터 그녀를 갈라놓는 모든 특권을 빼앗아 살 집도, 인사를 허락하는 이도 하나 없게 된 그녀가 스스로 내 도움을 간청하러 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불행하게도 나는 현실에서 가장 상이한 장점들을 한데 가진 여인을 연인으로 택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 점이 그녀 눈에 내가 매력적인 인간으로 비치리라는 기대를 전혀 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왜냐하면 공작 부인은 귀족 아닌 사람 중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만큼이나 부자였으며, 거기다 그녀를 인기 있는 존재로, 모든 사람들 사이에 여왕으로 만드는 개인적인 매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나중에 공작 부인에게 무관심해졌을 때에야 나는 부인의 여러 특징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특히 그녀의 눈은 한 폭의 그림마냥 프랑스 어느 오후의 푸른 하늘을 담고 있어 반짝이지 않을 때에도 넓게 드러난 채로 빛에 젖어 있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 들을 때는 쉰 소리에 거의 천박하기까지 했지만, 그 안에 콩브레 성당의 돌층계나 광장의 제과점마냥 시골 햇볕의 게으르고도 기름진 금빛이 구르고 있었다.



11월 마지막 날 산책길에 보았던 담장 아래 꽃들.



내가 생루의 레스토랑에 매일 저녁 똑같은 기분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어떤 추억이나 슬픔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다가, 때로는 다시 돌아와 오랫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레스토랑에 가려고 시내를 지나가는 저녁이면, 게르망트 부인이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웠다.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중얼거렸다. "게르망트 부인을 보지 못한 지 벌써 십사일이나 되었구나."


게르망트 부인은 수레국화로 장식된 챙 좁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수레국화가 상기시킨 것은, 내가 자주 그 꽃을 따던 콩브레의 밭고랑이나 탕송빌 울타리와 인접한 비탈에 비추었던 오래 전의 햇빛이 아니라, 게르망트 부인이 조금 전 햇빛 비치는 라페 거리를 막 통과했을 때의 저녁놀 냄새와 먼지였다.


단순한 옷차림일 뿐인데도 그 우아한 걸음걸이로(살롱이나 칸막이 좌석에 들어갈 때의 자태와는 전혀 다른) 부인은 아침 산책을-내게는 이 세상에서 산책하는 사람이 오직 그녀뿐인 것처럼 보이는- 우아함에 대한 시(詩) 한 편, 화창한 날씨의 가장 섬세한 보석이나 가장 진기한 꽃으로 만들 줄 알았다.



중국전통요법센터(TZM) 외부와 내부.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 영화 <No Time To Die> 이 다시  영화는 안소니 홉킨스의 <The Father>. 늦은 오후 뮌헨 시내의 작은 영화관에 관객이라곤 혼자였다.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귓가를 떠나지 않 대사 하나. What exactly am I? 알츠하이머에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난 도대체 누구인가? 당신은 또 누구인가? 알츠하이머란 이 두  질문 사이에 존재한다. 당신은, 나는, 대체 뭐란 말인지. 이 난감한 질문 앞에서 대답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일지. 


대체  불가 질문을 던져놓고 영화는 끝났다. 지금까지  영화들과는 다른 느낌. 치매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전개 방식이 있다. 뻔하고 식상한. 그런 군더더기가 없어 좋았다. 끊임없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화내는 것 말고는 대처가 안 되다가, 자신의 이름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지 못해 울 수 밖에  과정을 촘촘하고 내밀하게 끌어가는 방식도 좋았다. 동정도 감상도 자기 연민도 그럴 시간조차 없어서 더더욱 굿. 배우 역시 명불허전. 시간도 기대도 거스르지 않배우, 안소니 홉킨스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는 여름이 끝날 무렵 시작해서 초겨울에 끝났다. 그 간격이 얼마나 길었으면 가을에 책을 들자 줄거리 게르망트 부인과 주변 인물들 이름까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사이 항암을 끝냈고, 재발 방지를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휴양차 자연요법센터 입원해며칠 쉬다 올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노란 단풍들은 갈색으로 뒹굴다 사라진 지 오래고, 독서 끝내지 못한 푸른 책을  시간들도 귀퉁이처럼 닳아서 반질반질 윤이 나가을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랑도 삶도 독서도 승자는 시간이었다. 시간과의 경기는 백약이 무효. 백전백패. 일방적으로 밀리게임. 기 전에 더 추워지기 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꼬리표라도 붙여두고 싶은 이유.





*초록색 부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마르셀 프루스트/김희영 옮김/민음사)에서 인용함.

이전 16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