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뮌헨은 어디나 황금빛으로 빛난다.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못해서, 또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울적한 이들에게 마지막 선물인 양 어깨 위로 노란 손길을 올려놓고 말 없이 돌아서는 시월이여.
우리 동네 이자르 강 반대쪽에 있는 언덕 위의 성당에도 만추.
항암이 끝나고 가장 먼저 달려간 건 스케일링과 이명 치료를 위한 치과와 이비인후과였다. 스케일링은 항암 기간 동안 금지였다. 먼저 치과. 언제 봐도 기분 좋은 분, 헤어 훔멜 Herr Hummel. 이런 치과 샘을 만나는 건 최고의 행운이다. 나이는 서른 살 정도.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다정하기까지 한 사람. 독일인들에게는 미안한데, 이분은 진심 독일 사람 같지가 않다. 곱슬 금발 머리에 밝은 모습에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 상상이 되실는지. 코로나 시절에 환자에게 먼저 주먹 인사를 건네는 치과 샘이라니! 스케일링은 지난봄 이후 처음이었다. 독일은 보통 반년에 한 번 스케일링을 한다. 숙련된 간호사가 꼼꼼하게. 그렇다고 스케일링이 무료는 아니다. 1회 70유로 정도. 솔직히 돈이 안 아깝다. 너무 잘해서. 피도 많이 안 나고 안 아프고 거의 안 시리다. 내 돈 주고 하면서도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치과에서 인상 깊었던 건 대기실과 진료실 벽에 걸린 그림들이었다. 특히 대기실 소파 위에 걸린 해골 같은 저 그림을 보시라. 저 희고 앙상한 뼈만 남은 그림은 대관절 뭐란 말인가. 그림의 제목도 누가 그렸는지도 모르지만 예사롭지 않았다. 그림을 모르는 내 눈에도. (두 점의 그림 오른쪽 아래에 Hortsch라는 성만 확인할 수 있다.) 치아 엑스레이를 찍을 때처럼 이 뿌리를 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추와 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가식 같은 건 다 벗어던지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마주한 듯한. 치과에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 하나도 안 예쁜데 묘하게 감동을 주는. 그로테스크하고 음울하고 음침한 톤만으로 저토록 눈길을 끌어서 오래 잡아두다니. 오래 바라보니 가슴이 저릿해졌다. 사람으로 치자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빠져드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나쁜 남자, 나쁜 여자들 같다고 할까. 또 하나. 이 그림을 보자마자 연상된 이미지는 뮌헨의 영국정원, 엥글리셰 가르텐 Englischer Garten에 있는 그리스식 둥근 정자, 모노프테로스 Monopteros 였다는 것.
치과와 이비인후과 대기실에 걸린 그림(위). 치과와 이비인후과 건물(둘 다 1층). 이비인후과 앞뜰의 나무(가운데). 이비인후과 의사가 나와 남편에게 처방한 약들(아래).
이명 치료를 위해 주치의에게 이비인후과를 소개받았다. (독일은 보통 주치의에게 다른 클리닉을 물어본다.) 아주 친절하다는 여의사는 내게는 적당히 친절했다. 괜찮다. 불친절하지 않은 게 어딘가. 간호사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서 청력 테스트를 먼저 받음. 결과는 심각한 상태는 아니지만 이명이 심한 건 맞다고. 당연하지. 하이톤으로 밤낮 없이 들리는데. 처방은 두 가지였다. 은행과 중이염 약. 은행은 항암 때부터 먹고 있다 하니 어떤 제품인지 물었다. 사진을 보여줌. 좋다며 계속 같은 약을 복용하라 했다. 다음은 어린이용 중이염 드롭스 약인 오토보벤 Otovowen. 매일 아침/점심/저녁으로 15 방울을 물에 타서 마시란다. 중이염 약인지 모르고 약국에서 구입했다가 나중에 검색 후 알았다. 같은 안과를 다니는 남편에게 클리닉에 갈 때 왜 이명에 중이염 약을 처방했는지 물어보라 했더니 혈액순환에 좋다고. 귀도 혈액순환과 관련이 크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순환이 문제다. 어른들이 왜 귀를 자주 마사지하는지도 알겠다. (참고로, 남편은 이명과 불면증이 있었는데, 숙면을 도와주는 약을 처방받았다. 한국에서는 비타민으로 유명한 오쏘몰 제품이었다. 독일어로는 오르토몰 Orthomol.)
또 하나, 이비인후과 의사를 통해 알게 된 중요한 사실. 내가 궁금했던 건 항암의 부작용 중 이명이 흔한가 였는데 이비인후과 여의사를 통해 그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자궁암 환자들은 항암 부작용으로 이명이 자주 생긴다고 했다. 왜냐하면 항암 약인 카보플라틴 Carboplatin과 파클리탁셀 Paclitaxel 중 파클리탁셀이 이명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란다. 물론 청각이 약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겠다. 나와 똑같은 자궁암에 똑같은 약으로 항암을 했던 항암 동기 독일 여성 이어리스는 이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항암이 이명의 원인이라면 얼마나 지나야 경과가 나아질까? 의사의 말로는 항암 후 최소 8주가 지나야 알 수 있다고. 그리하여 다음 진료는 12월 초가 되었다. (8월 중순에 생겼던 눈의 이상 증상에 대해서도 알려드려야겠다. 눈에 뭐가 떠다니는 비문증. 다행히 대부분 사라지고 왼쪽 눈 귀퉁이에 희미하게 점 하나만 남았다. 혹시라도 걱정하실 분이 계실까 봐..)
올 가을 뮌헨의 영국 정원과 가이드북에 실린 영국정원의 그리스식 정자(아래/가운데). 얼마 전 영국정원에 간 날엔 사진을 못 찍음. (이 글을 쓸 줄 알았으면 찍어오는 건데..)
뮌헨의 영국정원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뮌헨의 영국정원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나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 버금가는 공원이라고 생각한다. 크기로만 봐도 100만 평이 넘고, 센트럴 파크보다 조금 크다고.* (나도 이 두 공원은 가 본 적이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행 때 잠시 들렀던 뉴욕의 센트럴 파크보다 어학 공부 때문에 석 달간 체류했던 런던의 하이드 파크가 더욱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뮌헨 시민들의 두 가지 자부심도 이자르 강변 산책로를 포함한 울창한 숲과 영국정원이 아닐까. 뮌헨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이 이자르 강과 영국정원 옆이라고 들었으니까. 나는 이자르 강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고 있는데, 집을 구할 때 이자르 강 옆이란 걸 알고 그랬던 건 아니고 순전히 우연의 결과였다. 어쨌거나 또 다른 삶의 행운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연속적인 우연의 선택이 모이고 모여 삶이 되듯 인생은 복불복? 원래부터 지지리도 운도 복도 없으시다? 걱정 마시라. 운의 속성은 노력이라는 성실한 동반자 없이 오래 버티지 못하는 법이니.이것이 위로가 된다면. 내게 그랬듯.
우리 집 뒤뜰도 만추가 한창이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 집 뒤뜰은 아니고 이웃집 아파트 건물의 공동 정원이다. 우리 집 부엌의 작은 발코니에서 사시사철 내려다보며 살다 보니 우리 집 뒤뜰 같다. 그렇다 치고, 뒤뜰에는 나무 한 그루. 얼마나 큰지 한국식으로 6층인 우리 아파트 건물보다 크고 높다.우리는 5층에 산다. 높은 기상으로만 보자면 봄/여름/가을에 상설 시장 아우둘트 Audult가 열리는 마리아힐프 플라츠의 마리아힐프 성당 첨탑도 찌를 태세다. 우리 집 발코니에서도 늦가을에 잎이 떨어지면 이듬해 봄 부활절 때까지 저 멀리 성당 꼭대기가 보인다. 시월 말, 바로 지금이 그때다. 잎 진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 내내 성당의 십자가를 볼 때의 경건함이라니. 요즘처럼 오후 6시에 해가 질 때. 오후 5시가 넘어 발코니 앞 건물 지붕에도 성당 꼭대기에도 석양빛이 비칠 때. 지붕들이 주홍빛으로 물들면 박자를 맞추듯 성당 옆에 황금빛이 솟아오를 때. 그럴 때마다 또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도 운이 좋은가.
10월 초순(위).10월 중순과 하순(가운데). 우리집 발코니에서 바라본 이웃 아파트 뒤뜰은 노란 가을이 가장 멋지다(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