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절 무상암 3
언니가 무상암을 찾은 것은 3월이었다.
언니가 무상암을 찾은 것은 3월이었다. 스님들을 만난 지 한 달 후였다. 스님들과 헤어진 날 한숨도 못 자고 다음 날 전화를 드렸다. 조만간 방문하겠다 하니 '날 풀리거든 오라' 하셨다.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이유를 몰랐다. 노스님은 땔감도 없이 한겨울을 견디는 중이셨다. 두 분이 같이 살기엔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작은 스님은 다른 곳에서 장애인 돌봄 일을 하며 자기 생계를 해결했다.
언니를 만났을 때는 두 분이 같이 1년에 한두 번 이태리 북부쪽 명상 센터에서 명상을 지도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무상암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기차로 서쪽 해안 제노바와 피사 중간쯤에 위치한 라스페치아에서 다시 레리치까지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버스를 내려서가 더 문제였다. 산복 도로를 오래 걸어 올라가야 했다. 무상암은 산 중턱에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땐 폐허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황폐한 작은 집이었다.
한국 신도는 없었다. 흔한 담벼락도 없었다. 1층의 작은 방을 개조한 법당에는 열 명이 둘러 앉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 옆에는 낡은 객실이 하나. 좁은 법당에는 오래전 한국에서 모셔 온 작은 불상과 탱화 한 점 만이 그나마 품위를 지켜주고 있었다. 이태리 몇몇을 위한 이태리어 반야심경과 한국어 반야심경 대여 섯 권이 법당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충만했다. 빈자리는 자연이 채워주었다. 찰랑찰랑 빛나는 햇살. 마당 한가운데의 올리브 나무와 수돗가의 무화과나무 한 그루. 뒷산에 새소리. 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뒷산 텃밭의 너럭바위도.
한 달에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사시는 노스님의 소망은 산길에서 무상암으로 접어드는 오솔길에 한국 절 느낌이 나는 우아한 돌담을 쌓는 일. 무상암 뒤편 공터에 넉넉한 법당 하나를 짓는 일. 고장이 잦은 작은 냉장고는 제쳐두고라도.
그해 여름 언니와 나는 여름 한 달 동안 무상암에서 살았다. 자격 미달 공양주였지만 언제나 즐거웠다. 매끼 식사는 소박했다. 혼자 있을 때는 아무 거나 드시거나 아무것도 못 드시거나 해서 노스님의 영양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태리 그린 비자를 받지 못해 병원에도 맘 놓고 가지 못했다. 몇 년을 더 기다려야 나온다고 했다.
산기슭은 습기가 많아 노스님은 관절이 안 좋았다. 다리를 절었다. 신발이 엉망이었다. 살생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계율을 지키느라 가죽신도 없었다. 시장에서 구입한 형편없는 신발 때문에 노스님의 발도 다리도 늘 부어있었다. 원래 건강한 체질도 아니신 분이.
언니가 무상암 스님들을 만날 무렵 나는 상해에 있었다. 거기에도 한국 절이 있었다. 3년간 상해에 살면서 제주에서 오신 스님과 경전을 공부하고 보이차를 공부했다. 그해 여름 이태리에 다녀와 절 소식지에 무상암에 대해 글을 올리자 보살님들이 십시일반으로 보시금을 모아주셨다. 이태리로 보냈더니 스님들이 제일 먼저 하신 건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사는 일. 여름에 언니가 스님들을 모시고 한국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