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이모를 위하여
아이가 태어나고 그해 봄 이모가 떠났다.
이모가 떠난 지 8년. 이모 나이 오십오 세였다. 이모의 유방암 전이 소식을 들은 건 싱가포르에 있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집안일에 운전까지 멀쩡하던 이모였다. 모든 것이 항암 치료와 함께 급속도로 나빠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늘 다정하던 이모였다. 형제가 많은데도 장녀였던 엄마는 유독 막내 이모와 친했다. 언니와 나 역시 외갓집 식구 중 누구보다 이모를 사랑했다. 말 한마디라도 언제나 따뜻했던 사람. 내 아이가 태어나 하나뿐인 언니가 아이의 이모가 되던 순간 자주 내 이모를 생각했다. 애기처럼 곱게만 키운 스물두 살 딸아이 생각에 편히 눈도 못 감았을 내 이모를.
그 애가 자라 서른이 되었다. 해마다 손수 제 엄마 제사를 지내며 몇 년간 아버지 병간호까지 하다 작년 연말 이모부마저 이모 곁으로 가신 후 말 그대로 혼자가 되었다. 힘들었을 텐데 내색도 않고 지금까지 잘 견디고 있는 걸 알면 이모도 기뻐할 것이다.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며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면서.
이모 가던 봄에 49재를 지내러 동생과 일곱 번 계명암에 올랐다. 범어사 말사인 암자는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범어사 오른편 숲길을 끝도 없이 올라가야 했다.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오를 때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럼에도 동생과 앞뒤로 나란히 걸을 때마다 말없는 위로를 받았다. 내가 함부로 건넬 수 없던 위로를 숲이 대신해주었다.
오월이었다. 그 봄엔 비가 자주 내렸다. 비가 온 다음 날엔 어김없이 두꺼비들과 만났다. 나무들은 말쑥했고 잎들은 반짝거렸다. 햇살은 개구쟁이들처럼 나무 뒤로 숨었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많은 두꺼비는 처음 보았다. 볼수록 그 묵직함에 위로를 받았다. 슬픔이 깊을수록 말은 필요가 없었다.
그때 만난 두꺼비들. 어미도 있고 애기들도 있었다. 두꺼비들을 만날 때마다 시에 담았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동생의 슬픔이 장독대 안의 장처럼 익을 무렵 옛일을 돌아보듯 가벼운 마음으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지금이 그때인 것 같았다. 더불어 동생과 걷던 그 숲길을 기억하는 한, 시로 남은 두꺼비들이 있는 한, 이모도 동생도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그것을 꼭 말해주고 싶었다.
마음사에는 두꺼비가 산다
마음사엘 가 본 적이 있나요
거기, 일곱 마리 두꺼비를 본 적이 있나요
가기 싫다고 자꾸만 징징대는 마음 달래서
모락모락 백설기 품에 안고 나는 보았죠
어둑한 법당에 앉아
슬픈 눈의 영정 앞에서
극락왕생 극락왕생 염불 하면
생사해탈 생사해탈 장단 맞추던
마음사엘 가 본 적 있나요
일곱 마리 두꺼비를 본 적이 있나요
한 걸음 뗀 후 오래 기다릴 줄 아는
느리지만 발걸음 결코 멈추지 않는
그리움
비 오는 금요일 오후
암자 다녀오는 길에 보았네
두꺼비 두 마리
선 긋지 않고
금 넘지 않고
초롱꽃 사이에 두고
오래도록 서로의 눈
바라만 보는 것을
아 좋아라
비 오시니 좋아라
안개 손잡고 산길 걸어 좋아라
어린 대나무들 만세 소리 좋아라
돌아앉은 동자 두꺼비 한 마리
결연한 뒷모습이 좋아라
누구나 다 가지요
먼저 가고 나중 갈 뿐
우리보다 앞서 온 보살들
담담한 목소리가 좋아라
아 좋아라
아 좋아라
법당 안 한글 주련도
법당 밖 한글 금강경도
얼굴도 본 적 없는 주지 스님의
선재라는 법명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