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은 옥토버 페스트

뮌헨의 편지 73

by 뮌헨의 마리
뮌헨의 옥토버 페스트 마차 퍼레이드(아래).



그리운 샘!


지금 뮌헨은 옥토버 페스트(2022.9.16-10.3) 중입니다. 올해는 조금 빨리 시작한 거 같네요. 9월 마지막 주에서 10월 첫째 주까지라 생각한 제 공식이 깨진 해였어요. 옥토버 페스트는 9월 중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고, 10월이 최소 하루만 포함되면 된대요. 옥토버 페스트가 시작되던 첫날 토요일은 한글학교가 개학하던 날이었어요. 한글학교와 한국 슈퍼 가운데 교차로에서 옥토버 페스트의 상징인 마차 퍼레이드도 보았답니다. 알리시아도 첫날 파파랑 옥토버 페스트에 가서 신나게 놀이 기구를 타고 왔고요. 저는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나서 못 타는데요. 올해는 비가 자주 와서 날씨가 받쳐주지 않은 게 아쉽긴 해요.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리는지 난리도 아니랍니다. 지난 2년 동안 남독일의 전통 의상 던들을 입고 싶어 어떻게 견뎠을까 싶을 정도로 색색의 던들과 체크무늬 셔츠와 가죽 바지와 가죽 부츠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네요.


옥토버 페스트는 들판 같은 테레지엔 비제 Theresienwiese에서 열린답니다. 주차비는 있지만 입장료는 없어요. 가방이나 백팩도 들고 들어갈 수 없고요. 입구에 맡기고 들어가야 합니다. 거대한 공간은 두 곳으로 나뉘지요. 한쪽은 맥주 천막 부스들. 다른 쪽은 놀이기구와 먹거리 포차 공간이에요. 맥주도 싸지는 않아요. 한 잔에 13-15유로 정도. 물론 잔이 몹시도 큽니다. 놀이기구는 평균 6유로 정도 하고요. 친절하게도 출입구 앞에 ATM 기계도 있더라고요. 들어가는 입구는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있어요. 저는 올해는 아직 들어가 보지 않았고, 옥토버 페스트 밖의 산책로를 걸으며 멀리서 구경했지요. 암도 이런 점이 비슷하겠구나 생각하면서요. 옥토버 페스트로 들어가는 인파를, 거대한 놀이기구를, 안에서 들려오는 함성을 들으며 생각했어요. 제가 살아온 삶을, 제 자신을, 타인과의 거리를, 암을, 암이 가져온 변화를 이만큼의 거리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나 하고요.



2022.9 옥토버 페스트 기사(Süddeutsche Zeitung/아래).



오늘부터 저는 이틀간 검사를 받습니다. 날을 잡아놓고 있어서인지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아서인지 한동안 글을 못 썼어요. 역시 매는 빨리 맞고 볼 일입니다. 그래도 간밤엔 잠을 잘 잤어요. 아침에 눈을 뜨고는 결전의 날! 그런 비장한 생각도 안 고요. 평소처럼 7시 20분에 알리시아를 학교에 보내고, 저도 집을 나섰습니다. 요즘은 클레멘스가 바빠 혼자서 병원을 다닙니다. 지하철 U1을 타고 두 코스에서 내리죠. 원래는 U2를 타고 한 코스에 내려 트람을 타는데 지금은 트람 노선 공사 중이라 임시 버스를 타요. 시간은 평소보다 10분쯤 더 걸리는 것 같아요.


8월 초에 검사를 받았는데, 어깨와 목 사이의 림프 결절이 조금 커졌대요. 제 기분엔 전이된 가슴뼈도 조금 커진 거 같고요. 정기 검사는 11월 초인데 일정이 당겨진 거죠. 다시 항암이냐 방사선 치료냐를 결정하는 검사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순순히 따르려고요. 하루면 검사가 끝나는데 이번엔 이틀을 오라고 하네요. 첫날은 피를 뽑고, 코로나 검사를 하고, 설문지에 체크를 하고, 접수처에 서류 접수를 합니다. 둘째 날은 초음파를 찍고, CT 촬영을 하고요. 하루에 다하면 될 텐데 왜 이틀이나 오라 했는지 물어보려다 관뒀어요. 원래는 하루만 예약했었는데 크루즈 여행 중에 전화가 와서 하루 더 오라고 할 땐 거기도 사정이 있었겠죠.


저항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기운이 파하지 않는 한 가지 방편이라는 것을 암 투병을 통해 배웠습니다. 마음의 저항.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땐 애쓰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낫더라고요. 삶에 대한 저항과 운명에 대한 저항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저는 제 삶에 만족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삶이 이렇게 흘러올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제가 살아온 결과니까요. 삶의 중간 정산 보고서라 할까요. 저는 암을 통해 배운 게 많지 않아요. 암 이전과 이후로 크게 바뀐 것도 없고요. 성질머리는 여전하고, 잘난 척하고 오만한 태도도 여전합니다. 다만 나이 오십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삶의 결과물이자 제 책임이라는 것 하나쯤은 받아들이게 됐어요. 암의 순기능이겠네요.



9월이 낙엽처럼 지고 있네요. 병원 근처 프랑스 카페.



샘.

크루즈 여행에서 돌아온 후 홀가와 세 번째 독일어 책을 시작했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요. 그런데 두 번 정도 읽고는 그만뒀습니다. 한국어 번역본을 읽을 땐 몰랐는데 독일어로 읽으려니 재미가 없어서요. 결국 어부의 세계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한 셈이죠. 홀가에게 양해를 구한 후 올해 12월쯤 계획했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Stolz und Vorurteil>으로 바로 들어가기로 했답니다. 흥미 없는 책을 억지로 읽기엔 세월이 짧으니까요. 제인 오스틴이 헤밍웨이보다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제겐 더 즐거운 주제여서 어려워도 동기부여는 충분할 거 같거든요. <오만과 편견>을 마치면 제인 오스틴의 나머지 다섯 작품에도 도전하고 싶어요. 3년쯤 걸릴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암치료 여정에는 장기 프로젝트가 중요할 거 같아서 꿈을 꿉니다. 무사히 끝날지 여부와는 상관없이요.


전에도 말씀드린대로 요즘은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어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기분으로 윤찬의 피아노 협주곡들을요. 잘은 몰라도 이렇게 눈과 귀와 영혼을 한꺼번에 만족시키는 피아니스트를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연주를 직접 듣는 게 아니라면요. 언젠가 존경하던 스승께 커피와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신 계기를 여쭈었더니 길게 오래 파고들 수 있는 주제라서,라고 말씀하신 뜻을 이제야 것 같네요. 앞으로 제겐 고전 문학과 클래식 음악이 그럴 지도 모르겠어요. 여전히 클알못 수준이지만 하루 일정을 마치고 부엌까지 말끔히 정리한 후 머리맡에 독서등을 켜두고 윤찬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을 때면 위대한 음악가들과 만나는 기분이 들어요. 라흐마니노프와 베토벤과 모차르트와 리스트를요. 음악이 참 위대하구나 싶지요. 궁극의 아름다움이라 할까요. 문학 작품을 읽을 때와 같은 감동 말이에요. 그럴 땐 살아서 음악을 듣는 게 고맙고 행복합니다.


검사 첫날 일정을 마치고 병원 근처의 프랑스 카페에 와서 카푸치노와 크라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 글을 니다. 20센트 팁을 포함한 5.40유로의 행복이지요. 살면서 이런 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압니다. 이런 건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니까요. 카페 창가 구석의 하늘색 의자에 앉아 2시간쯤 제인 오스틴을 펴놓고 글쓰기에 몰두합니다. 이런 시간들을 저는 꼭 기록해야 합니다. 기록하고 싶습니다. 제가 불행할 수 없는 순간들이라서요. 그러고보면 지난날들은 다 아름답게만 보이네요. 저는 곧 일어나 카페를 나설 겁니다. 아침에는 비가 왔는데 지금은 비가 그쳤거든요. 해를 따라 푸른 하늘도 나왔고요. 산책길에는 거리에 떨어진 낙엽이 보기 좋다고, 지나가는 독일 할머니가 미소를 띠고 낯선 제게 말을 거시겠지요. 낙엽 한 장 같은 가을날의 작고 사소하고 다정한 친절을 기억하려 합니다. 저 역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친절을 가족에게, 친구에게, 타인과 제 자신에게 건네고 싶기 때문입니다. 샘, 9월이 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잘 지내고 계시리라 믿어요..



검사 첫날의 하이라이트는 빨간 빗자루. 도로 청소차 화물칸에 반듯하게 세워져 있던(위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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