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하는 날이 좋다. 슈니츨 바게트도

뮌헨의 편지 74

by 뮌헨의 마리
항암 전날 피검사 데이. 돈가스 슈니츨을 잘라넣은 바게트와 햄 앤 치즈 샌드위치. 카페 지붕 위로는 청명한 가을 하늘.



그리운 샘.


시월도 한 주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요즘 뮌헨은 하루는 날씨가 좋고 하루는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 며칠째 반복되고 있어요. 일요일엔 올가을 최고의 화창한 날씨였다가 월요일엔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더니 화요일은 가을가을한 해가 다시 나왔답니다. 항암 전날 피검사를 가는 날엔 새벽에 비가 내렸는지 사방이 촉촉했어요. 이런 일희일비의 날들을 좋아합니다. 다음날에 대한 기대로 우울할 틈이 없으니까요.


월요일엔 슈퍼에서 오전 근무를 하고, 화요일엔 오후 근무를 한답니다. 슈퍼에서 일하는 날엔 일이 없는 오전과 오후 시간에 방사선 치료를 받지요. 치료가 끝난 후에는 가을비와 가을 햇살 속을 번갈아 산책하며 돌아왔어요. 무게감이 없는 초경량 소형 우산 하나만 있어도 걷기 충분한 비였거든요. 소슬비라고 할까요 보슬비라고 할까요. 비가 와도 무조건 걷습니다. 피곤한 날엔 산책길이 끝나는 곳에서 지하철 우반을 타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일과 산책 사이 자투리 시간에는 병원 앞 카페에서 자주고요.


피검사 전날엔 프랑스 카페에서 슈니츨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었답니다(4.50€). 요즘 독일의 체감 소비자 물가가 무척 오른 것 치고는 괜찮은 가격이거든요. 작은 카푸치노 한 잔은 2.90€. 총 7.40€의 행복이죠. 맛이요? 너무 좋았어요. 마요네즈가 들어 있어서 느끼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목넘김이 부드러웠어요. 며칠 전부터 슈니츨이 먹고 싶었거든요. 집에서 잘하지 않아서 그런 지도 몰라요. 금요일 저녁엔 외식을 하기로 했어요. 지난여름 카타리나 어머니 생신 파티를 했던 그륀발트의 비어가든에서요. 비엔나 슈니츨인 소고기 돈가스가 맛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피검사 하던 날엔 변심해서 햄 앤 치즈 샌드위치를 먹었고요. 가격이 착해요(3.50€).



방사선 치료를 가는 길.



샘.

요즘 알리시아는 11월 초의 가을 방학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답니다. 방학은 1주일이에요. 여기 기준으로는 길지 않아요. 눈 깜짝할 사이에 가버리겠죠. 알리시아가 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는 방학 직전에 라틴어 시험이 있기 때문이에요. 가만 보니 죽을 맛인가 봐요. 그렇다고 주말에 라틴어를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았어요. 예전 같으면 잔소리를 심하게 했을 텐데 저도 그러진 않았고요. 크게 화가 나지 않았고,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입은 굳게 다물었죠. 알아서 잘할 거란 기대요? 그런 건 없어요. 낙제를 하든 턱걸이를 하든 책임은 본인이, 그 원칙만 고수하려고요. 역시 투병에 대해 그렇고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알리시아에게 저녁 8시 이후로 절대로 공부하지 말고 밤 10시에는 무조건 불 끄고 자라 했더니 불은 껐는데 침대에서 몰래 공부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모른 척하고 다음날 아침에 물었더니 배시시 웃으며 이실직고하더라고요. 그러지 말라고 했죠. 푹 자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테니까요. 어느 날은 새벽에 일어나서 라틴어 공부를 하는 거예요. 아침 6시에 일어나면 제 침대로 와서 30-40분 더 자는데 그날은 아침 인사만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길래 더 자나보다 했는데.. 글쎄, 책상 앞에 앉아있는 제 딸의 뒷모습을 발견한 거예요. 무지 생소하더라고요.


알리시아는 올가을 김나지움 7학년이 되었어요. 우리 나이로는 열세 살이고 초등 6학년. 내년엔 열네 살이 되고 한국으로 치면 중1이 되네요. 대학에 가려면 아직도 6년이나 남았네요(왜 이리 안 크나요! 키는 저랑 같은데 나이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거 같아요..) 아직 본격적인 사춘기는 시작되지 않았어요. 자기 방에 불쑥 들어오는 거 싫으니까 그렇게 하지 마라, 정도가 다예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안아달라고 칭얼거리고, 아침에 엄마 침대로 쏙 들어오는 보면요. 내년 2월 만 열세 살이 되면 틴에이저가 됩니다. 살벌한 사춘기도 몰고오겠지요?


알리시아는 요즘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기에 빠져있어요. 김나지움에서 매년 하는 학년 추천 도서도 재밌게 읽고 있고요. 글도 쓰고 싶어 하죠. 대학에 가면 수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싶대요. 신기하네요. 저 같은 문과생에게서 이런 제대로된 이과생 딸이 나오다니요. 파파 덕분이겠죠. 근데 그림과 책 읽기와 글 쓸 시간이 없어서 속상하다는 거예요.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요. 제가 교통정리를 해줬어요. 오후 6시까지 숙제와 공부를 다 끝내고 저녁엔 하고 싶은 걸 다 해! 다음날 과목이 많은 날엔 공부가 안 끝날 때도 있대요. 그럼 안 해도 돼! 라틴어 시험이 내일인데 오늘 저녁 학교에서 하는 핼러윈 파티는 갔다 오겠대요. 그러라고 했어요.(이 정도면 엄마가 많이 바뀐 거죠?)



하루는 이런 날씨.
하루는 저런 날씨.



샘.

어제는 말씀드린대로 피검사를 하는 날이었어요. 문제가 없으면 다음날 세 번째 항암을 할 거라고 했어요. 시작이 반, 그렇게 절반이 끝나는 거죠. 피검사를 마치고 암센터 휴게실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방사선 치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요. 오전에 방사선 치료까지 마치고 그날의 미션은 끝이 났고요. 점심 때는 프렌치 카페에서 작은 카푸치노 한 잔과 샌드위치를 먹었어요. 그리고 또 걸었죠. 시월의 마지막 주인데도 날씨가 춥지 않아서 걷기가 좋았어요.


피검사를 하러 오는 길에 어떤 젊은 여성이 제 앞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지쳐 보였어요. 시간이 넉넉해서 서두르지 않았더니 암센터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마주쳤어요. 같이 암센터로 들어가서 옆자리에 앉았죠. 마침 그날은 마리오글루 샘이 계셨어요. 샘이 제 피검사를 때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요. 그리고 제 옆자리의 여성과 나누시는 대화도 들었어요. 그녀가 구토가 심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부작용이 없는 항암은 드문가봐요. 아직까지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고요.


오늘은 세 번째 항암을 마치고 병원 뒤편 숲 속 소파 같은 벤치에서 쉬고 있어요. 날씨가 좋아서 햇살 아래 비스듬히 누웠는데 춥지가 않네요. 전날 호중구 수치가 낮다고 해서 오후에 다시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어요. 어제 주사를 맞은 덕분에 오늘 항암은 그대로 진행했고요. 항암을 세 번 했으니 절반을 마쳤네요. 전날에는 새벽 3시에 잠을 깼어요. 허리가 아파서 아침까지 못 잤답니다. 항암 때 여의사 샘께 말씀드렸더니 호중구 주사 때문에 그럴 수가 있대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뭐지, 하며 많이 놀랐거든요. 전이라도 되었나 해서 새벽부터 눈물 바람도 했고요. 항암을 할 때만 해도 계속 허리가 아파 앉아있기가 불편했는데 차츰 좋아져서 나중엔 눈도 붙일 수 있었답니다. 오후에는 방사선 치료와 다리 부종 치료가 남아있어서 하루가 것 같아요. 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온천천과 남산길과 범어사와 해운대와 광안리 바다도 안녕한지요. 다 그립습니다. 샘도 Y언니도 친구 M과 후배 M도, 부산의 가을도요.



세번째 방사선을 마치고 병원 뒷편 숲길. 소파처럼 길고 넓고 둥근 벤치에서 간식과 휴식.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뮌헨은 옥토버 페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