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의 마지막 날이었어요. 뮌헨은 날씨가 흐리고, 낮 기온은 3도로 떨어졌어요. 다행히 비는 안 내렸고요. 항암을 하느라 가는 줄도 모른 채 시월을떠나보냈어요. 방사선 치료차 매일 병원을 다니며 병원 앞에 있는 프랑스 카페에서 붉은 단풍처럼 고운 들장미 차와 샌드위치를 먹던 시월에요. 러시아의 두 작가플라토노프와 고리키의 중단편집을 읽은 것도 그때였고요. 둘 다 가을날에 잘 어울리는 책이었어요. 항암이 끝난 지도 두 주가 되어갑니다. 그동안 뭘 했냐고요? 글쎄요, 저는 뭘 했을까요. 뭘 했길래 십일월이 쏜 화살처럼 지나가 버렸을까요.
아, 뮌헨 한글학교에 실릴 글의 교정을 봤네요. 교정을 보다가 밑천도 딸리고 궁금한 것도 많아서 맞춤법과 문장 쓰기에 대한 책을 손에 들었고요. 김정선의 <열 문장 쓰는 법>과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를 읽었고, 같은 저자의 <동사의 맛>과 <끝내주는 맞춤법> 등 두 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출판 단행본 교정 교열 일을 하며 남의 문장을 다듬어 온 전문가의 달고 시고 맵고 짠 세월의 결실이랄까요. 한 마디로 문장의 정석이자 해법이자 표본에 가까운 책들입니다. 저자에겐 미안한 표현이지만, 이런 책들이 뭐가 재미있다고 깨알같이 아껴가며 읽었을까요. 고작해야 머리 아픈 맞춤법과 문법과 어법에 맞게 글을 쓰자는 책인데요. 그럼에도 팩트는 재미있었다는 거예요. 플라토노프나 고리키만큼이나요!
차를 마신 전시장의 작품과 11월의 장미 세 송이.
또 있네요. 한글학교에서 퍼레이드 행사 때 알게 된 친구가 있어요. 밝고 적극적인 성격에 누구나 좋아할 타입이죠. 저와는 차 한 잔 나눈 사이도 아니지만요. 어느 날 그 친구로부터 차를 마시러 오라는 톡이 왔어요. 온라인으로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스님을 모셨다고해요. 마음공부에서 멀어진 지 꽤 오래인데도 생각해 보겠다고 한 건 친구에 대한 호의 때문이었어요. 누가 차를 마시러 오는지도 궁금했고요. 그날은 열두 명 정도 왔더군요. 절반은 한글학교에서 아는 얼굴이었고요. 비까지 내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저녁이었어요. 부드러운 연잎차와 맑은 보이차를 마시며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듣기에 좋은 날이었죠.
한때 저도 '깨달음'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아니고요. 깨달아서 뭐에 쓰려고? 그런 물음이 제 안에서 생겨난 후부터요. 깨달음이 가당키나 한가, 그런 뜻은 아니에요. 깨달음을 위해 매진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될 수 있지요. 그렇다고 중생사가 그보다 못한 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뿐이고요. 부처가 중생이고, 중생이 부처라고했잖아요. 자타불이,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곧 나고요. 깨달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만이 최상의 가치라고 믿을 때 동반하는 위험도 조심해야 하고요. 정신의 허영과 오만에는 약이 없으니까요. 그후로제게는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매일 매 순간 고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들 삶 자체가 위대한 깨달음의 장이니까요. 이보다 더 완벽한 무대가 어디 있을라고요.
그날 저녁 저는 긴 탁자의 끝자락에 앉아 스님과 참가자들의 이야기에 고요히 귀를 기울였어요. 차담이 이루어진 곳은 전시 공간이었는데 흰 벽마다 작품들이 걸려 있더군요. 제 앞에도 입체적인 나무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열 걸음쯤 떨어진 출입문 바깥으로는 빗길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도 간간이 들렸고요. 따듯한 차가 오가는 탁자 위로는 무아와 무상이 무림의 고수들처럼 소리 없는 한 판 승부를 겨루고 있었어요. 무아면 어떻고 무상이면 어떤가요. 1시간 남짓한 차담이 끝나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가 이어지는동안 저는 친구에게 조용히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날 저녁이 제게 선물한 깨달음을 마음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한 채로요. 그게 뭐였을까요.. 암은 없다. 내가 없는데 암은 어디에?
병원에서 산책길로 가는 길. 이태리 레스토랑 벨라 로마 화단에 핀 11월의 소국.
샘.
암이 찾아온 후로 제 삶은 암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예전의 저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했어요. 특히 시간에요.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고요.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일상이 다 편안합니다. 일을 해도 즐겁고 놀아도 즐겁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무엇도 없고, 이루지 못한 어떤 것 때문에 후회하거나 자신을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항암 투병이 생각보디 힘들지 않았던 것도 한몫한 거 같아요. 부작용이 컸더라면 지금보다 마음이 많이 약해졌을지도 몰라요. 약한 항암을 하고, 먹는 항암약을 복용하지 않은 게 부작용 없는 항암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즘 저는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주 두 번은 한국 슈퍼에서 일을 하고요. 한 번은 병원의 자연요법 센터에서 열치료와 고용량 비타민 요법을 받고 있어요. 또 한 번은 다리 부종 때문에 림프 마사지를 받지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 편안한 일상입니다.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검사는 3개월 뒤에 받기로 했답니다. 12월에는 열흘 정도 자연요법센터에 휴양차 입원을 하고요. 작년 12월에 갔던 것처럼요. 거기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오직 먹고 자고, 걷고 쉬고, 책을 읽고 음악만 들을 거예요. 생각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뛰네요.(참, 항암 4주째부터 빠지던 머리는 항암이 끝나고 열흘 만에 진정 모드에요. 앞으로는 자랄 일만 남았겠지요?)
샘은 어떠신가요? 일 때문에 바쁘시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많으시다 들었어요. 걱정되네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잖아요. 저 보세요. 암에 대한 저의 중간 정산은 음식과 운동과 수면과 스트레스가 각각 동등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마지막에 스트레스로 그런 균형이 깨진 것 같고요. 조심하시고 또 조심하셔야 해요. 요즘 독일은 위드 코로나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크리스마스 마켓도 열리고요. 주말에 마리엔 플라츠로 나가면 어마어마한 인파에 놀라 빨리 집에 가고만 싶다가도 코로나 때 썰렁하던 거리를 생각하면 사람 사는 게 이런 거지 싶어 금세 기분이 나아지지요.샘, 십일월이 가고 십이월이 옵니다. 첫눈은 언제 올까 궁금해하다 십일월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갑니다. 늘 건강하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