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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Oct 19. 2022

황금빛 시월에

2차 항암



황금의 가을. 뮌헨의 시월.



지난주에 항암과 방사선을 동시에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에 시작 오후 2시쯤 끝난다. 장장 4시간. 그 긴 시간 동안 뭘 하냐고? 글쎄. 작년의 경험에 비추어 책을 준비해 갔다. 내겐 후배 M이 항암 직전에 딱 맞춰 보내준 제인 오스틴 소설이 다섯 권이나 있었다. 최소 한두 시간은 맨 정신으로 읽을 수 있겠지 낙관했다. 항암은 길어야 두세 시간일 테고. 희망과는 달리 4시간이 걸렸다.


항암은 링거를 맞는 것과 비슷하다. 액체가 든 7개의 팩을 차례로 맞는다. 내가 맞아야 하는 항암은 두 개다. 그중 한 개는 손발 저림과 통증을 유발한다. 그동안 잊고 있다가 자연요법센터 Dr. 뵐펠 샘의 말씀으로 다시 알았다. 항암 직전에 상담을 했는데 안타까워하시며 물으셨던 것. 항암 때 손발은 괜찮았냐고. 저린 적은 있어도 큰 통증은 없었다 하니 다행이라며 안심하셨다. 지난해 항암을 시작한 이후로 뵐펠 샘으로부터 비타민 C 고용량 요법과 전이가 된 가슴뼈에 열치료 Hypertermie를 받고 있다. 샘의 추천으로 미슬토 주사도 꾸준히 집에서 맞고 있는데, 방사선 치료 때는 비타민과 열치료는 중단해야 한다.

 

다시 항암. 우리 간호사님이 얼마나 느리게 조정해 놓았는지 항암액이 똑, 똑 한  방울씩 떨어진다. 술술 떨어지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한마디로 복장이 터진다. 그때 알았다. 꽉 채워 4시간은 걸리겠구나. 마음을 비우고 책을 펼친다. 여름에 읽은 <오만과 편견>을 제외하고 당연히 첫 책은 <이성과 감성>. 문제는 얼마 읽지도 했는데 졸렸다. 작년에도 항암 때마다 잠이 쏟아졌다. 4시간 내내 졸다가 1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항암을 하는 동안 3번이나 링거를 끌고 화장실을 가야 하는 번거로움. 다녀와서는 또 졸고. 그래도 다행 아닌가. 아픈 것보다 낫잖나. 졸리면 . 통증도 없이.


항암이 끝나고도 한동안 멍한 상태가 계속된다. 센 감기약을 먹은 것 같다고 할까. 눈도 풀리고 몸도 흐느적거렸다. 병원 로비 휴게실 소파에서 잠시 쉬었다. 도시락에 넣어간 사과도 먹고. 입맛이 없거나 구토 증상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작년 항암 때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5개월 간의 1차 항암을 잘 넘긴 건 이런 대표적인 부작용이 없이 잘 먹었기 때문이다. 이번이라고 다르랴. 그때보다 더 약한 항암이라는데. 더 기다렸다가 방사선까지 마치고 집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정신이 몽롱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기에. 귀가 직전 마트에도 들러 소고기를 다. 집에 와서는 바로 . 2시간 자고 일어나 저녁을 먹고 또 잤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휴식은 언제나 옳다.



한국슈퍼 J언니가 정원에서 꺽어오신 과꽃. 저 치명적인 색깔을 보시라!



다음날은 평소처럼 일어났다. 충분히 자서 피곤하지는 않았다. 오전 내내 나물을 다듬고 삶고 데치고 무치기를 반복했다. 방사선 치료가 오후였기에 쉴 시간은 충분했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비가 내리는 바람에 방사선 산책은 못했다. 오전 날씨가 좋아서 우산을 안 들고 갔기 때문이다. 주말에도 계속 쉬었다. 카카오 사고로 톡도 조용하고, 브런치도 접근 불가. 아이는 토요일 오전에 한글학교를 다녀와서 친구 집에서 자고 일요일 오후 늦게야 돌아왔다. 그게 문제였다. 아이와 즐기던 토요일 밤 k드라마는 없었던 것. 의기소침. 토요일 오후의 두 시간 산책에도 지치고.


일요일도 화창했다. 얼마든지 기운을 차려 산책을 가고 맛있는 음식을 해먹을 수도 있었다. 피곤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의욕 상실. 가장 경계해야 할 문제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책 읽고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덕분에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맨스필드 파크>까지 끝내고 <엠마>읽고 있다. 밥 생각도 없고 움직이기도 싫었다. 이러다 우울증으로 가는 건 아닌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빨리?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암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기분이다. 일을 가나 마나 오랜 고민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가을 아닌가. 안 그래도 외로운 계절인데. 고립만피해야 한다. 하는 일도 어렵지 않으니 기분전환이라 생각하 가는 걸. 한국 슈퍼 분식 코너 책임자인 J언니와는 즐거운 수다. 꼼꼼하고 야무진 젊은 동료 Y와는 다정한 대화. 그것도 우리말로! J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점심 언니가 날 위해 정원에서 꺾어오신 매혹적인 과꽃 한 다발. 돈 때문은 아니다. 벌면 얼마나 번다고. 외롭지 않으려고 간다. 고립은 고독이나 쓸쓸함과는 차원이 달라서 잘못하면 정신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수가 있어서.


일요일 늦게 돌아온 아이와 k드라마도 보았다. 딱히 재밌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가 오 전까지 남편에게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준 것도 인정해야겠다. 우울에 절어서. 이해해 주겠지? 그래도 미안한 건 사실이다. 남편 말고 누구한테 이런 스트레스를 푸나 싶다가도 예민한 와이프가 투병한다는 핑계로 제멋대로 구는 걸 참아주기가 말처럼 쉽지 만은 않을 것이다. 다행히 한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과 화요일에 일하러 간다고 밝은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가 썩 괜찮은 기분으로 돌아온 아내를 본 남편은 안도하는 듯했다. 수요일인 오늘은 피검사를 받았고, 목요일엔 다시 두 번째 항암을 한다. 잘 되겠지. 아직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고 잘 버텨주고 있으니.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매일 걸어오는 산책길. 병원에서 집까지는 5킬로/8000보. 딱 1시간이 걸린다.



항암 전에는 두 번이나 민들레를 캐러 갔다.  슈탄베르크의 현경이네 집에. 현경이네 정원 잔디밭에 민들레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손바닥 두 개를 펼친 것만큼 큰 가을 민들레를 먹어도 된다는 생각은 못했다. 슈퍼의 J언니한테 듣기 전까지는. 부지런한 언니가 정원에서 민들레를 잔뜩 캐와서 민들레 나물을 하시기 전까지는. 그때까지 민들레는 봄에만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 언니가 말하길, 내게도 좋을 거란다. 오, 당연히 좋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언니는 잘 말려서 차로 마시라 했지만 내가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다는 걸 내가 모르겠나. 푹 삶아서 된장국에 넣어 먹거나 나물로 먹을 생각이다. 먹어 보니 생각만큼 쓰지도 않았다.


슈탄베르크에 두 번이나 가면서 카타리나 어머니 댁에는 들르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만 보내고 나는 현경네에서 민들레를 캐고, 현경 맘과 수다를 떨었다. 남편이 먼저 지지해주었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듯했다. 한번 하기가 어렵지, 자꾸 하니 쉬웠다. 시어머니 댁에 가는 걸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지금은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지. 의무감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편했다. 어머니는 수술 이후 건강을 완전히 되찾으셨다. 덕분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시누이 바바라가 밀착 케어를 하는 것도 안심이 되었다. 바바라가 그 일을 꽤 즐기는 듯도 하고, 그 보상으로 자기 휴가를 꼭꼭 챙기는 것도 여전히 신기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법칙이 있겠지.


올 가을에 7학년(한국으로 치면 중1. 내 아이는 왜 이리 안 크는지!)이 된 아이는 공부를 힘들어한다. 자기 말로는 다 좋은데 학교가 재미없다나. 숙제도 괜찮고, 혼자 공부하는 것도 괜찮은데, 라틴어가 괴롭단. 주요 네 과목 중 수학은 잘하고, 영어와 독일어도 중간은 하는 라틴어는 힘들어한다. 솔직히 나는 아이가 김나지움에 오기 전 초등 4학년부터 김나지움에 들어온 지 2년 동안 아이에게 공부 스트레스를 꽤 주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안 건 우리 언니의 충고 덕분이었다. 천사 이모를 둔 아이는 알까. 엄마가 100% 공부에 집착을 놓았다는 걸. 그렇다, 나는 더 이상 아이의 성적을 걱정하지 않는 대범한 혹은 무심한 엄마가 되었다. 언니 말대로 공부를 못 하면 어떤가. 라틴어 때문에 유급을 하면 어떤가. 대학을 못 간다고 인생이 끝나나.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면 되지! 요즘 아이는 일요일 저녁만 되면 다음날 학교가 가기 싫다고 한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제발 학교만 가달라고 부탁한다. 공부? 성적? 다 필요 없고. 엄마가 병원 가기 싫다고 하면 니 심정은 어떻겠냐고 슬쩍 감성에도 호소해 가면서. 덕분인지 월요일마다 아이는 학교에 잘 가주고 있다. 아직까지는.



저 푸른 민들레, 저들처럼 다시 일어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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