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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Nov 09. 2022

네 번째 항암은 못했지만 장아찌와 김치는 담갔다

제인 오스틴과 세계 중단편집을 읽으며


항암이 끝나기 전에 제인 오스틴 읽기를 끝내고 세계 단편선 으로 넘어갔다(위). 한 주 건너뛰고 네 번째 항암을 하며 점심으로 먹은 슈니츨+햄 샌드위치와 간식 도시락(아래).



요일 이른 아침 항암을 하러 병원에 다. 피검사와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카페로 이동. 샌드위치와 따끈한 차와 벽난로의 온기 같은 플라토노프의 단편선 <귀향>읽으며 항암 예정인 정오까지 시간을 보냈다. 간식으로 싸간 도시락은 오후 세 시 항암이 끝나고 병원 뒤편 숲의 벤치에서 먹었다. 작은 바나나와 귤은 먹기 바빠서 사진 찍는 것도 잊었다. 도시락엔 삶은 계란 두 개와 한국 슈퍼에서 산 오색떡. 지난주에는 항암을 못했다. 호중구 수치가 낮아서 한 주 쉬자고 다. 몸이 힘드니 무리하지 말자는데 불안과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안도감도 따랐. 정해지대로 따르는 게 쉬울 때가 있다. 바로 이런 경우다.  모든 과정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시라!


전날인 월요일아침 8시에 병원에서 피검사를 받았다. 이번에도 호중구 수치가 낮다고 오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한국 슈퍼에서 오전 근무를 마치고 병원에서 호중구 주사를 맞았고(다행히 이번에는 허리 통증이 없었다! 오늘 마리오글루 샘께 한 번 더 여쭤보니 호중구 주사가 뼈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고 재확인 해주셔서 안심, 또 안심), 해도 지고 깜깜한 저녁 6시에 방사선 치료도 받으러 갔다. 1일 3회 병원 출석이었지만 별로 열받거나 피로하지는 않았다. 그런 날도 있지, 생각했다. 자고로 복잡한 날엔 생각 없음이 최고의 수다. (한 주 고 네 번째 항암을 하는 화요일 오후에 슈퍼에 물건이 들어오는 날이라 걱정이 됐, 이번 주는 온다고. 이렇게 손발이 척척 들어맞기도 어려운..)



나의 생애 첫 장아찌들, 양배추/양파(위). 시금치/무/민들레 장아찌(아래).



날은 얌전하게 하루 마감하기 어렵겠 싶었. 주말 저녁에 유튜브를 보고 만능 장아찌 소스를 만들 장아찌를 담근 게 화근이었다. 전날 담근 양배추 장아찌와 양파 장아찌무장아찌는 발코니에 가지런히 놓아두다. 다음  살짝 데친 시금치로 시금치 장아찌냉장고에 남아 있던 삶민들레로 민들레 장아찌를 담갔. 유튜브에서 시금치 장아찌를 보고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태어나서 처음 해 본 일인데, 이게   이렇게 재미있지, 신기해하며.


말이 나온 김에, 장아찌를 담기 전에 김치부터 담근 얘기를 해야겠다. 며칠 전에 사놓고 발코니에 던져놓은 무가 바람이라도 면 어쩌 걱정되던 차에 우리 동네 마트 에데카 Edeka에 들렀더니 배추가 두 통이나 있더란 말이지. 에라, 모르겠다. 이런 일은 저지르고 볼 일. 불금에 아이랑 k드라마 <김과장>을 끝내기로 했는데 혹시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멈춤이 안 되니 그전에 배추부터 절여두었다. 배추 절이고 김칫소 만들면 김치는 게임 끝 아닌가. 이번에는 포기배추 말고 먹기 좋게 썰어서 맛김치를 담았다. 무채를 넉넉하게 준비하고 찹쌀풀에 까나리 액젓과 마늘과 생강과 사과를 갈아 넣었다. 갓 담은 김치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위에 얹어 한 입 먹었더니 글쎄, 입 안에 금세 푸르고 청정한 바다 맛과 하늘 향이 묻어 나오더래 뭐래나.



나의 김치!



세 번째 항암 이후부터 계속 머리가 빠지고 있다. 이런 낭패가! 이보다 우울한 일이 어디 있겠. 아직은 가발을 쓸 단계아니지만 혹시 몰라 옛날 가발도 찾아놓일할 때는 머리에 두건도 꼭 다. 혹시라도 사방에서 내 머리칼과 만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하기에.  빠지긴 뭘 안 빠져! 저녁마다 내 손가락 사이로 수북이 빠져나오는 머리카락만 보면 절로 우울해져글쓰기마저 싫어질 때가 있었다. 거기다 열흘 정도 아침마다 배가 살살 아프다가 설사를 했는데 암센터에서 받은 약을 먹고 금방 나았다. 날씨도 며칠 그저 그랬다. 계절은 11월, 이름만 들어도 쓸쓸해지는  아닌가. 다행히 내겐 M이 보내준 제인 오스틴이 있었다. <맨스필드 파크>와 <엠마>에 이어 <노생거 사원>과 <설득>을 읽으며 그 시간들을 견뎠다. 지금은 손에 들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세계 단편집읽고 있다. (재미 없는 책은 절대로 안/못 읽음!)


( 누가 궁금하다고  적도 없건만, 참고로 세계 중단편 중 나의  쓰리를 물으신다 20C 러시아 작가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플라토노프의 <귀향> 막심 고리끼의 <은둔자>를 들겠다. 세 번째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 내가 본 건 민음사에서 펴잘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작품들을 모은 <뭔가 유치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녀의 걸작은 <가든파티>와 <차 한 잔> 일 것이다. 모더니즘 단편 소설의 백미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 오죽하면 버지나아 울프가 질투를 느낀다고 했겠는가! 그 외에도 다시 읽고 싶은 단편 문학은 숄로호프의 <숄로호프 단편선>. 그중 <인간의 운명>을 보시라! 내 운명에 무조건 감사하게 된다. 읽을 때마다 감탄과 경탄이 교차하레스코프의 <왼손잡이>,  번을 읽어도 지루한 줄 모르는 츠바이크의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카사노바를 좋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슈니츨러의 <카사노바의 귀향/꿈의 노벨레>빛나는 작품들이. 21C 작가 중에서는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빼놓을 수 없겠. 여기에 단편, 하면 떠오르는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도 한 몫하겠고. 단편 소설 원고비로 먹고 사신 분이라서. 죄송하게도, 단편 작가로 최초로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 캐나다의 앨리스 먼로는 내겐 극도로 이해하기 난해하고 난처한 작가였다. 20대에 용기 백배해서 겐자부로에 도전했다가 책을 던져버린 상황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미국의 레이먼드 카버좋아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하루키가 편애하신다 한들, 어쩌랴, 내 취향이 아닌 걸..)


각설하고. 항암은 계속되고, 나는 여전히 산책을 하고, 일을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삼시 세 끼를 고민하며 살고 있다.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심심하면 유튜브에서 먹고 싶은 레시피를 찾아본다는 것. 한우에 비해 퀄리티와 맛과 가성비가 뛰어나 자주 소고기 다릿살과 소꼬리와 사골뼈를 사서 곰탕을 끓이고, 잘 익은 고기와 대파와 양파가 어우리진 국물에 소금 간도 안 하고 밥을 말아먹기를 좋아한다. 남편을 위해서는 첫 번째 사골 육수를 남김없이 따라 붓고 보드라운 고기와 깍둑 썬 감자와 양파, 방울토마토, 파이슬리를 넣고 감자 수프를 끓인다. 간은 이분들 입맛에 맞게 간장 대신 치킨 스톡 한 조각. 지난번에는 큰 냄비에 가득 끓였는데 맛있다고 바닥까지 싹싹 비우시더라는. 나? 소꼬리와 사골뼈를 재탕해서 잘 익은 김치나 장아찌와 먹으면 꿀맛이겠지. 아이? 둘 다 잘 먹는다. 내가 항암을 무사히 건너는 비결이라면 비결. 책과 함께! (신은 아니고..)



나를 위한 소꼬리 곰탕과 남편을 위한 사골 육수 감자 수프(위). 발코니엔 장아찌와 감홍시가 상시 대기 중(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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