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등산화를 신고 산책

산책길 끝에는 나무에 핀 크리스마스 트리

by 뮌헨의 마리


나의 새 등산화!



새 등산화를 샀다. 생각해 보니 등산화를 산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 한국에서는 운동화를 신고 산에 다녔나 보다. 기억나는 등산화가 없는 걸 보니. 독일에 와서도 몇 번 트래킹을 갔는데 그때도 등산화가 없었다. 사야지 해놓고 못 사고 다음 트래킹에 나섰다. 맘에 쏙 들고 가볍고 발이 편한 등산화여야 하는데, 뭐든 지나치게 전문화된 독일 스타일을 생각하면 무거운 등산화가 떠올랐다.


같이 일하는 J언니와 두 번 숲 산책을 간 이후로 이번에야말로 등산화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때는 크리스마스 아닌가. 카타리나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라고 주신 돈을 남편이 봉투째 건네주었다. 오호라, 때가 왔구나! 신발을 사러 가기 전에 나름의 기준을 정했다. 가볍고, 방수 되고, 신발 바닥이 미끄럽지 않을 것. 겨울용 말고 사계절 신을 수 있고, 가파른 등반용이 아닌 숲 산책길용으로.


드디어 시내로 나갔다. 아이가 같이 안 가줘서 혼자 갔다. 인상이 좋은 중년 남자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딱딱해 보이는 중년 여자 직원은 패스. 경험상 말 걸기가 어렵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니 두 개를 보여주었다. 첫 번째 신발은 걸어보니 스키 신발을 신고 걷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 아실 거라 믿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대는 느낌 말이다. 스텝이 착착 달라붙지 않고 반 박자 늦게 지면에 닿는. 우주용도 아니고 뭐지. 두 번째 신발은 발에 꼭 맞았다. 일반 신발보다 한 사이즈 컸는데도 발에 착 감겼다. 가볍고 디자인이 투박하지도 않았다. 바로 샀다. (가격은 200€.)



산책 끝엔 차와 바게트 샌드위치.



새로 산 등산화를 신고 피트니스도 갔다. 내게 자기 집안의 항암 비법을 알려주던 탄야는 없었다. 해맑은 20대 초반의 남자 트레이너가 담당이었다. 트레이너가 초보인지 아닌지는 운동을 해보면 안다. 신입은 운동이 끝나도 땀이 안 남. 베테랑 트레이너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이틀 정도는 팔다리에 근육통이 온다. 그래도 괜찮다. 빡세게 하는 날도 있고 슬슬 하는 날도 있는 거지. 다 배울 게 있다. 신입과는 가볍게 몸을 풀기 좋잖나. 피트니스 후 새 등산화를 신고 걷기에 딱 알맞게.


목표는 병원 앞 단골 프랑스 카페까지로 정했다. 걷기에도 목표가 있어야 덜 지루하지. 새 신발 같지 않게 착용감이 좋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평소에 자주 신어 길이 들어야 반나절 정도 숲 산책도 문제가 없겠지. 날씨는 흐렸지만 아주 춥지는 않았다. 오히려 카페 안이 생각보다 따뜻하지 않아서 옷걸이에 걸어둔 패딩을 입어야 했다. 문제는 1주일에 두어 번 이 카페에 올 때마다 샌드위치의 유혹을 거부하기 힘들다는 것. 빵을 적게 먹어야 하는데. 속 편하게 먹기로 했다. 맛있게 먹으면 기분도 좋아지니까. 집으로 돌아가면 아침부터 무 배추 잔뜩 넣고 끓여놓은 된장국도 있으니까. 그렇게 타협을 했다.


걷다가 이런 날씨에 어울리는 오래된 노래가 생각났다. 노래 탓인지 마음 탓인지 흐린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눈발이 흩날릴 것 같다. 사랑의 슬픔. 깃털처럼 가벼운 리듬에 은근슬쩍 실려오는 묵직함. 첫눈 온다고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언제였던가. 눈발 날리는 12월의 추운 거리에서 사던 붕어빵. 떡볶이에 뜨거운 오뎅 국물은 어떻고. 외국에서 그리움의 원천은 런 것들이다. 그냥 음식이 아니라 추억과 한 묶음이라서. 붕어빵과 떡볶이와 오뎅 국물에 줄줄이 소환되는 정다운 얼굴들. 나 다시 한국에 들어가면 잊지 말고 꼭 사주기 바란다. 다시 걸어야겠다. 걷다가 한바탕 눈물 바람을 지는 아직 모르겠음.



산책로 끝에 있는 비어가든에 피어난 크리스마스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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