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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Nov 04. 2023

항암을 위한 준비 1

피검사, 미용실 그리고 겨울 신발

독일에서 보기 드문 빨간 단풍잎.



휴가를 다녀와서 약간 흐린 후기(제목도 바꿨다. '가 후기는 흐리지만 마음까지 흐리지는 않아요')렸더니 걱정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런 일도 일어날 수 는 것이다. 싸게 주고 바꾼  이어에 바람이  시어머니 화가 나실 수 있. 이면 날마다 맑은 날만 있을 수 있나. 끝이 좋으면 다 좋겠지만 끝이 안 좋다고 다 안 좋았던 것 아니다. 그날 집으로 는 길에머니 때문에 마음하지는 않았다. 러시려니 했다. 오니 휴가는 휴가대로 좋고 집은 집대로 좋았다. 충분히 쉬었고 체력도 비축했다. 집을 떠난다는 자체가 휴식이고 가사로부터의 해방니까. 부에게 그 정도면  선물이 . 집에 도착해서는 곧바로 가방을 정리했다. 도착해서 바로 하지 않으면 귀찮아서 몇 날며칠  수 있는 게 짐 정리. 정하고 하니 15분 만에 끝낸 것 같다. 대부분 세탁해야 할 옷이고, 세안 용품과 화장품, 신발과 겉옷과 여분의 옷과 양말을 제자리에  끝. 남편 짐 정리 더 간단했다. 음날은 아침부터 세탁기를 두 번 돌렸다. 빨래를 널고 나 몸도 마음도 개운. 빨래이런 맛에 하는 .



산책로 입구.



도착한 날 저녁부터 부지런을 떤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항암 전에 피검사 예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에는 금요일 오전에  피검사는 간단히 끝났다. 암센터에서 처음 보는 여의사 샘이 내 피를 뽑으며 물었다. 컨디션은 어떠냐고. 통증은 없냐고. 컨디션도 좋고 허리도 좋아졌으며 통증도 없었다. 월요일 시작하는 항암에 대해서도 잘 숙지하고 있냐고 묻길래 잘 안다고 대답했다. 내경험 있니까. 휴가 좋기는 좋았던 모양이다. 컨디션이 술 전라왔고 기운 차고 넘쳐서 기분으로는 그까짓 항암 정도야, 하며 곧바로 달려들 기세였다. 허리 무릎을 조금만 굽히면 바닥까지 손이 닿 회복되었다. 잘 때도 돌아눕워졌 걷는 속도도 빨라졌다. 피검사를 마치자 림프 마사지 예약까지 시간이 넉넉해서 병원에서 산책길까지 다. 날 흐렸는데도 단풍 부시게 고왔다.



산책로의 낙엽들.



머리도 잘랐다. 항암을 시작하기 전에 길고 정돈이 안 되는 머리를 정리하고 싶었다. 어차피 빠질 머리지만 짧은 상태에서 머리가 빠지면 그 위에 가발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계획은 그는데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 흘러가나. 글쎄 내 미용사 파비가 내 머리를 얼마나 짧게 잘랐는지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맘에 안 드냐고 길래 배추 머리 같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 말이 우스운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게 웃을 일인가. 남의 배추 아니 머리 농사 다 망쳐놓고 말이다. 조금 산뜻하게 항암을 시작하려다 살짝 망한 기분이랄까. 뭐 잘라서 바닥에 뒹구는 머리도로 갖붙일 수도 없고 앞머리 길이라도 사수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 가발도 쓰기 전에 매일 방한모자만 쓰게 생겼다. 울상을 하고 돌아온 내게 아이가 위로의 말을 던졌다. "걱정 마, 엄마. 파비 머리가 원래 그렇잖아. 처음엔 울고 싶은데 좀 지나면 좋아지잖아.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저걸 위로라고 하나. 아이의 말에 웃지도 울지도 못한 나.



산책로의 노란 단풍.



드디어 11월. 항암에 산책까지 어라 하려면 좋은 신발 필요하겠지? 맨날 사는 게 신발 같은데 또 사는 것도 신발이다. 사는 김에 온 가족이 월동 준비를 하기로 했다. 아이 신발을 고르는 게 제일 오래 걸렸다. 남편과 나는 이태리 브랜드인 Geox에서 금방 골랐다. 나는 가볍고 단순한 디자인으로 초겨울과 초봄처럼 살짝 추운 계절에 신기 좋은 발목까지 오는 앵클부츠를, 남편은 구두 대신 겨울에 신기에도 적당한 스니커형의 날렵해 보이는 가죽 단화를 샀다. 속전속결이 남편과 나의 쇼핑 스타일이라면 심사숙고형 사춘기 딸은 자기가 원하는 게 확고해서 좀처럼 타협이라는 싸구려 전술을 쓰지 않다. 여섯 군데 신발 가게를 돌아본 후에야 마지막에 하나를 골랐는데 그것도 얼굴을 찡그린 채 마치 엄마 생각해서 대충 사 준다는 티를 팍팍 냈다.


아이도 지치고 나도 지쳐서 (남편 지쳤는지 모르겠다. 말없이 따라오기만 는 분이라) 투알리안 근처 일본 라면 가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이 나오기 전까지는 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라면이 나오자마자 젓가락부터 진했 사진 찍는 것은 까맣게 잊었다. 여기만 오면 꼭 그런다. 아이가 엄마, 사진! 했을 때 벌써 라면은 단정함을 잃고 신줄을 놓 상태. 또 오지 뭐. 그때 찍으면 되. 안 그런가. 그렇게 휴가 뒤의 하루가 또 지나갔다. 한 번 해 봤다고, 아는 게 병이라고, 항암 전에 준비할 건 왜 이렇게 많은. 시작하기 전에 벌써 지려고 한다. 이런 기분 비슷하다면 말이 되려나. 셰익스피어 시절 <햄릿> 연극을 관람하던 어느 관객의 에피소드다. 햄릿이 하도 선왕에 대한 복수를 과감하게 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온갖 번와 번민과 고민과 고뇌라는 건 다 끌어안고 방황하며 복수를 지연하자 이를 지켜보던 성질 급한 관객이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안 죽이면 내가 죽인다!!!" 지금  심정이 다. 항암이고 뭐고 빨리 시작으면 좋겠다. 

 


병원 뒤뜰에도 만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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