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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Nov 05. 2023

항암을 위한 준비 2

보리 잡곡죽과 맨발 걷기와 청바지

나의 첫 죽은 야채 보리 잡곡죽.



항암을 위한 준비는 팔 할이 음식이겠다. 나는 무척 간략한 전술을 짜고 있어서 마음의 부담은 적은 편이다. 항암 이틀 전인 주말과 항암 당일인 월요일까지 보리 잡곡죽만 먹는 <사흘 항암 단식>을 실천해 보려고 한다. 죽도 먹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도 곁들이니 단식이라고 말하기도 쑥스럽지만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 나의 죽 레시피는 정말 쉽다. 잡곡에 보리를 섞어 밥을 한다. 끓인 보리차에 보리 잡곡밥을 넣고 죽을 끓인다. 여기에 잘게 썬 채소를 넣는다. 처음이라 집에 있는 채소를 거의 다 넣어봤다. 감자, 양파, 파, 마늘, 당근, 무, 파슬리. 아쉬운 건 셀러리가 없다는 것. 다음엔 셀러리도 넣어보려고 한다. 서양 채소 수프의 3대 기본이 양파, 당근, 셀러리라는 걸 유튜브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맛? 일품이었다. 아이도 먹고 싶다고 해서 아이에겐 따로 덜어 간장과 참기름으로 간을 맞춰주고 김치도 곁들여주었다. 나는 간을 일절 하지 않고 먹었다. 그래도 맛있었다. 채소에서 우러나오는 풍미란 게 있잖나. 착각인지는 몰라도 채소와 잡곡만 든 보리죽인데도 고소한 맛이 났다. 편과 아이가 주말 죽 프로그램에 동참해 준다면 가사 노동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다. 만 더 끓이면 되니까. 단식 첫날은 아침에 과일과 채소를 먹었고, 점심 저녁에 죽을 먹었다.


항암이 끝난 다음 날부터 나흘 동안의 식단도 고민해 봤다. 이미 밝혔듯 '쉽게 가즈아'가 이번 항암의 모토라서 휴가에서 돌아와 한 냄비 끓여놓은 김치찌개가 항암 첫 주에 유용할 것 같다. 이 나흘 동안 고기를 먹어도 되니까 옛 동료 J가 바리바리 싸  정성 가득 소고기를 활용해 볼 생각이다. 예전 항암 때는 언니가 독일로 따라와서 소고기를 매일 구워 주었는데 문제는 소화가 안 되어서 항암 기간 동안 뱃속에 가스가 많이 다. 고기를 기름에 구워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번에는 소고기로 장조림을 해보려고 한다. (한 번도 안 해 봤다. 유튜브로 검색은 했는데 엄두가 안 나서 계속 미적거리고 있다.) 기름기도 적고 가족들과 같이 먹기도 좋아서 밥반찬으로 좋은 대안이 될 것 같다. 관건은 맛, 대충 해도 맛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매주 메뉴를 바꿔가며 김치찌개 다음엔 미역국, 미역국 다음엔 된장국, 된장국 다음엔 소고기 뭇국 이런 식으로 한 주 버텨볼 생다.



사흘 단식의 스타트는 아침에 채소와 과일.



토요일 오전에는 해가 났다. 맨발 걷기를 가 볼까 싶었으나 늦게 일어나 아침 식사로 먹을 채소와 과일을 가족 수만큼 준비하고 죽까지 끓이느라 12시가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아이가 동행해 주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날씨 푸근했다. 아이는 모래 놀이터 있는 통나무에 앉아 책을 읽고 나는 맨발로 모래 위를 걸었다. 30분쯤 지나니 푸르던 하늘에 흰 먹구름이 살포시 깔리 해가 들어갔다. 해가  바람이 불고 날씨가 쌀쌀해졌다. 아이는 엄마가 추울까 봐 걱정했지만 정작 나는 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지 싶어 얼른 양말과 신발을 신고 집으로 돌아왔다. 맨발 걷기 시간은 30분. 짧아서 아쉬웠지만 안 한 것보다야 나았다. 그사이 다시 해 나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이자르 강변 산책로를 아이와 나의 등 데워주었다. 다음 주 주간 날씨를 살펴보니 내가 항암을  월요일만 해가 나오고 이후로 쭉 비 소식이다. 잠깐이라도 해가 나와 주으련만.


맨발 걷기를 하고 돌아와 따뜻 죽을 먹었는데도 몸이 추워서 매트를 켜고 침대에서 1시간을 쉬었다가 시내로 나갔다. 항암 전에 하나 더 살 게 있었다. 겨울용 청바지. 내가 가지고 있는 꺼운 청바지는 꼭 맞지만 조금 불편하고 얇은 청바지는 편하지만 올겨울 나기엔 추울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아이에게 사 준 항아리 스타일 바지가 이도 적당하고 편안하고 따뜻해 보였다. 슬쩍 입어 보니 괜찮 것 같아아이와 똑같은 청바지를 한 사이즈 큰 걸 사 왔다. 이만하항암에 필요한 준비는 대충 끝난 것 같다. 핑을 마치자 오후 6시 성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빅투알리엔 마켓 문을 닫을 시간. 그런데 빅투알리엔 시장의 가게 하나가 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여러 가지 채소와 과일을 샀다. 사과, 포도, 당근, 토마토, 대파, 비트, 셀러리, 버섯, 긴 줄기 그리고 파슬리. 내 보리 잡곡죽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재료들이었다.  먹고 기운을 내야지!



아이가 따라와 준 맨발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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