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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Nov 06. 2023

항암을 위한 준비 3

몸에게 건네는 사과

바람 부는 일요일의 산책.



바람이 몹시 부는 일요일이었다. 해가 나길래 남편과 손을 잡고 이자르 강가로 산책을 나갔다가 바람이 심해서 강의 다리를 두 개도 지나지 않아 돌아서야 했다. 산책을 나가기 전 폰으로 일기예보를 보니 못 보던 바람 표시가 있길래 바람이 좀 부나?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독일의 일기예보를 만만하게 봤다가 큰코다칠 뻔한 날이었다. 맞바람은 몸에 저항이 커서 힘들었는데 등 뒤로 맞으며 반대로 걸으니 걸을 만했다. 그럼에도 체력 소모가 커서 금방 지쳤다. 다리 건너 빵집에서 차라도 마시고 가자는 남편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와 따뜻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싶바람뿐이었다. 


장조림도 해야 했다. 어느 구독자 분께서 쉬운 장조림 레시피를 알려주셔서 그대로 해봤다. 주말 동안 죽 단식을 하느라 제대로 간을 보거나 맛을 볼 수는 없었지만 민만 하던 숙제를 끝낼 수 있어 후련했다.  단식은 생각보다 어렵지도 쉽지도 않았다. 죽 단식 이틀 째인 일요일 저녁에는 배가 안 고프다는 (어찌 된 애가 배가 고플 때가 거의 없음.) 아이에게 고슬고슬하게 갓 지은 흰 밥에 계란 프라이를 두 개 얹어서 간장과 참기름으로 비벼 주자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그런데 그 간장으로 버무려진 밥이 그렇게 먹고 싶 것이다. 내가 말이다! 엄마의 간절한 눈을 의식한 아이가 계란 없이 간장만 살짝 묻 흰 밥 한 귀퉁이 떼 주었다. 그래 간장 묻은 밥 몇 톨 먹는다고 죽기야 하랴. 사흘 죽 단식이 끝나면 맛나 보이는 간장 계란 비빔밥부터 먹어주리라. 계란은 몇 개?



이자르 강변 공원.



산책에서 돌아와 쉬고 있을 때 한국에 계시는 어떤 분에게 전화가 왔다. 오래전에 알던 분이었다.  뵌 지 15년쯤 되나. 그동안 궁금했지만 소식을 알 길이 없었는데 그분 역시 나를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어찌 내 연락처를 아시고 얼마 전에 전화를 주셨다. 사람의 인연이란 신기하다. 좋게 만났던 사람은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도 좋다. 한 번의 통화로 못 보고 살았던 지난 세월을 단숨에 건너뛸 수 있었다. 이번이 두 번 통화. 한국 시간은 자정일 텐데. 내 항암일이 다가오니 전화를 주신 게 아닌가 싶었다. 필요한 건 없냐고, 책이라도 보내줄까 물으셨다. 책은 내년 여름에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한국으로 날아가서 받겠노라 했다. 갑자기 물으시니 필요한 게 생각나지 않다가 도를 하셨다는 말에 차를 부탁드렸다. 내 경우엔 녹차는 몸을 차게 해서 안 좋고, 평소에는 임산부도 마실 수 있다는 루이보스 차와 카모마일을 자주 마시라고 조언해 주셨다. 그리고 내게는 보이차가 좋겠다고 하셨다. 감사하게 받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옛날에도 아낌없이 누구에게나 잘 퍼주시는 분이었다. 그런 공덕으로 지금까지 그분이 인생을 잘 살아오신 게 아닐까 싶다. 살면서 그런 인연을 만나는 건 특별히 고마운 일이다.


항암 전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불안하거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담담했다. 다시 하라면 하는 것이다. 다만 이번에도 잘 해내야 한다. 부작용 없이. 그래야 내년 여름에 또 한국엘 가지. 그리운 샘과 언니들도 만나고 보고 싶은 친구들도 만나서 갓 지은 솥밥을 원 없이 먹고 오지. 서울에서 내 절친이 소개한 한의원에서 침도 맞고. 맛있는 엄마 밥 먹고 언니랑 아침저녁으로 맨발 걷기도 하고. 아이랑 이모랑 쇼핑도 다니고. 한글학교에서는 문학 수업도 다시 시작하고. 각만 해도 즐거웠다. 자기 전에 유튜브로 무를 이용한 반찬 편을 봤는데 얼마나 아삭하고 상큼해 보이던지! 양배추와 사과 피클은 또 어떻고. 빨리 만들어 먹고 싶은 생각 밖에 었다. 이건 괜찮은 징조다. 항암 시작할 환자의 머릿속에 먹고 싶은 음식뿐이라니. 낌이 좋지 않은가. 항암을 시작하면 우리 집 근처 마리아힐프 광장에서 수요일과 토요일 열리는 오픈 마켓에서 장을 보기로 했다. 산책도 되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다양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좋다.


한국에 허리 수술과 항암 소식을 알리지 못한 친구들이 몇 있다. 이해해 주겠지. 잘 끝내고 좋은 소식 전하기로. 새벽에 잠이 깨서 다시 잠들 때까지 시간이 걸다. 자주 있는 일이다. 이럴 땐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면 안 된다. 수술 전 통증이 심했던 부분과 아랫배에 두 손을 대고 내 몸에게 사과를 했다. 몸아, 주인을 잘못 만나 니가 고생이 많구나. 잘 돌봐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동안 힘든 일이 많았는데 잘 뎌준 것도 고마웠다. 몸에게 하는 사과는 한국에서 전화를 주신 분께서 내게 알려주신 명상법이다. 몸을 어루만지며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해 주라 하셨다. 좋은 명상법 같다. 그리고 일어나서 따뜻한 물 한 잔과 사과 한 조각은 내 몸에게 주는 선물이 되겠지. 사과란 이래저래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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