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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Nov 07. 2023

항암 첫날이 피곤하지 않았다

항암 1주 차

항암약은 2개, 나머지 5개는 식염수와 희석제 같다.



항암 첫날 나는 놀랐다. 왜냐면 각오했던 것보다 안 피곤해서. 오전 9시에 암센터 도착. 항암은 총 3시간이 걸렸다. 무척 선방한 스코어다. 예전에는 보통 4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건 당일 간호사에 전적으로 달린 일데 마침 오늘 내 담당자는 호랑이 간호사님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날 근무조이긴 했지만. 7개 수액을 맞을 때마다 삐 소리가 나고 그때마다 호출벨을 눌러야 해서, 간호사가 제 때 와주면 빠르게 진행되고 바빠서 늦게 오면 전체 진행도 지는 경우 많다. 수액양을 너무 약하게 해 는 간호사 있다. 몇 번이나 빨리 떨어지게 해달라고 부탁해도 안 들어주 그럴 때는 총 4시간 이상을 각오해야 한다. 오늘 나를 담당했던 간호사는 인상은 무섭지만 쿨한 데가 있는 분이었다. 나이는 50대 후반. 내가 수술 전 무서운 통증으로 병원 갔을 때 내모습을 보신 모양이었다. 난 기억에 없지만. 그날 나에게 모르핀을 놔 준 간호사 내가 아프다고 해도 눈도 깜짝 안 하고 오히려 금요일에 왔다고 면박을 주던 호랑이 간호사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항암 첫날에 또 운이 좋았던 건 공동 치료실이 아니라 3인실로 배정을 받은 것. 3인실이지만 가운데 침대는 빼고 양쪽 2개 침대에만 환자를 받기 때문에 쾌적다. 나는 햇살이 비치는 창가 쪽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나와 같이 치료받 환자는 20대 중후반의 흑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나와 대화를 나눌 의사가 없어 보였다. 이해한다. 나도 첫 항암 땐 그랬으니까. 그녀는 나보다 링거 수가 적었는데도 항암 시작부터 내 항암이  때까지 깊은 잠을 잤다. 나도 전에는 그랬다. 그때는 항암 받을 때도 왜 그렇게 피곤하던지. 이번에는 같은 약이라고 몸이 벌써 익숙해진 건가? 안 피곤했다. 전혀 안 피곤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강도가 예전보다 많이 약해서 항암 때도 잠을 안 잤다. 혼자 대중교통으로 오가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집에 오기 전에는 마트에서 장도 보았다. 이번주 먹을 야채죽을 끓이기 위해서. 대박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확실히 놀라운 진전이고 변화다. 2년 전 첫 항암과 비교하자면. <항암사흘단식>을 몰랐던.



병원 가는 길.



나는 이게 <사흘 죽 단식> 효과가 아닐까 추측한다. 오후 2시 반쯤 집에 와서 남은 죽을 다 먹었다. 아침에는 병원에 가기 전에 아이 도시락을 싸며 채소와 과일을 조금 먹었고, 금방 배가 불러서 작은 도시락에 남은 채소와 과일을 싸가서 항암 중에 먹었다. 보통은 항암을 마치고 먹는데 그날따라 내 옆에 옆에 있던 젊은 흑인 여성이 부스럭거리며 과자를 먹는 게 아가. 갑자기 나도 입이 궁금해져서 사각거리며 호기롭게 도시락을 해치웠다. 저녁에는 고구마 하나를 생으로 깎아서 아주 잘게 썰어 저녁 대용으로 먹었다. 오후에 3시간가량 침대에 누워 쉬었기 때문에 배는 안 고팠다. 항암 후 당일 오후에 쉴 때도 차이가 있었다. 예전에는 집에 오자마자 언니가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곧장 침대뻗어서 오후 내내 잠만 잤다. 이번에도 침대에서 쉬기는 했지만 잠은 안 왔다. 오후 6시 전 일어나 가족들 저녁을 준비했고, 이번주에 내가 먹을 야채죽도 준비했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천천히 즐기면서 했기에 피곤하지 않았다. 긴 줄기콩, 호박, 감자, 당근, 양파, 파, 마늘, 토마토, 셀러리, 파슬리. 첫 죽에 못 넣어서 아쉬웠던 채소들을 모조리 넣었다. 기대된다 나의 두 번째 죽. 왜 계속 죽인가 물으신다면 보리 잡곡밥이 소화가 힘들 것 같 체하면 큰 일이라서. 참고로 첫 항암 일정과 항암약과 용량은 다음과 같다. (11.6(월) 09:30-12:30/파클리탁셀 Pacllitaxel 100.80mg/카보플라틴 Carboplatin 281.74mg)


야채죽이 다 될 무렵 양쪽 시어머니께 전화도 드렸다. 두 분 다 내가 항암 하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전화를 드리지 않으면 걱정하실 수도 있고. 먼저 카타리나 어머니. 계속 말을 안 하다가 지난 주말에 전화로 커밍아웃했다. 항암 한다고. 놀라셨지만 이게 팩트니 어쩔 수가 없다. 잘해볼 테니 너무 염려 마시라고 안심시켜 드리는 것 말로는 방법 없.  분 다 덜 피로했다는 내 말에 안심 하신 것 같았다. 두 분을 안심시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안 피로한 결과로 두 분이 안셨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이번 항암 중 <사흘 죽 단식법>에 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시작했다. 죽 단식이 항암을 도와서 다 잘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맨발 걷기도. 항암 첫날에도 해가 나길래 항암 후에 맨발 걷기를 나가고 싶었지만 너무 무리일  같 참았다. 내가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나 오버를 하면 실제로 안 좋을 수 있고, 많은 분들에게 걱정을 끼쳐드릴 수도 있으니까. (맨발 걷기는 내년 봄 항암 이후에 본격적으로 할 계획이다.)



병원 뒤편 숲 산책길.



빅투알리엔 마켓에서 사 온  아침에 삶았다. 비트는 삶은 것보다 껍질 채 찌는 게 영양 손실이 적다고 하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지금이 비트가 제철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동네 마트서 올해 처음 생비트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중간 크기 비트를 세 개 사 왔다. 생으로 깍둑썰기를 해서 샐러드로 먹는 법을 유튜브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비트는 생으로 먹으면 소화 흡수가 떨어진다는 얘기도 있는데 일단 먹어보고 판단하기로. 트 보관법은 상온에서는 빨리 쭈글해지므로 하나씩 키친 타올 싸서 지퍼백에 넣어 냉장 보관해야 한다고. 부엌의 요리 재료 서랍장을 뒤지다가 힐더가드 어머니가 주신 것 같은 생강+레몬 가루를 발견했다. 따뜻하거나 차가운 물에 타 먹을 수 있는 가루였다. 지금까지 왜 안 마셨을까? 뜨거운 물에 저을 때 생강가루 향이 좀 세게 올라오긴 했지만 호흡을 멈추고 약이라 생각하며 원샷으로 마셨다. 뜻하게.


참, 서울의 언니와 영상 통화를 하다가 내 머리를 처음  우리 언니 왈, 오 귀엽다! 이거 햅번 스타일 아니가? 엥, 이건 배추 머리 아니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꽃양배추 머리인데? 그런데 동생을 위로하려 속이 해파리만큼이니 훤하게 들여나보이는 우리 언니는 계속 햅번이라고 우기시고. 드디어 이태리 이모부님까지 등장. 언니가 물었다. 자기야, 쟤 머리 햅번 아니가? 지난 여름보다 나? 이모부님 왈, 훨씬 낫네! 지난 여름엔 메두사였! 아이고, 언니의 박장대소를 뒤로 하고 그쯤에서 덮기로 했다. 메두사가 꼴뚜기나 말미잘로 곤두박질치기 전에. 언니와 통화 도중 탈모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나의 첫 항암 때 우리 언니가 얼마나 걱정이 많았던지 머리가 하얗게 세고, 탈모 증상까지 왔다. 블로그에서 본 '커피 샴푸법'을 보고 따라 해 봤단다. 맥심이든 어떤 종류의 커피든 알갱이를 샴푸와 함께 녹여서 두피에 바르고 1-2분 기다렸다 헹구는 아주 쉬운 방법이었다. 유튜버는 석 달을 해보라 했지만 언니는 한 달 정도 하다가 이게 무슨 효과가 있겠나 싶어 그만두었고 그 일도 잊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언니가 늘 가는 동네 미용실을 갔다가 미용사가 그러더란다. 고객님, 머리숱이 많아지신 것 같네요. 그러면서 언니가 하는 말, 나도 해보란다. 항암 하며 빠지는 머리에도 효과가 있을까 하니 이유야 상관없겠지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한 번 해볼까로 슬며시 기우는 마음. (이쯤 되면 거는 셋 중 하나. 사람 마음 약한 건지, 간사한 건지 아니면 내 귀가 팔랑 귀인 건.)


아이도 꽤나 엄마의 모습에 고무되고 안심이 된 듯했다. 오에 침대에서 쉬고 있는데 예전에 내가 암수술을 할 때 엄마랑 닮았다는 이유로 힘내라고 자기가 내게 선물한 뚱뚱이 인형을 찾아서 손에 쥐어주었다. 저녁에도 밤인사를 하러 와서 슬그머니 뚱뚱이를 내 가슴안겨주었다. 나는 아이에게 인형을 도로 쥐여주며 이 인형은 더 이상 '뚱뚱이'가 아니라 '안심이'라고 확실하게 말해주었다. 왜냐, 엄마는 더 이상 안 뚱뚱하거든. 그리고 얘는 우리 딸 엄마 걱정 안 하도록 안심시켜 주는 안심이가 될 거니까. 우리 딸 근심 걱정 다 들어주고 걱정 대신 희망을 주는 안심이. 사춘기 아이는 칫 하면서도 듣기 싫지는 않은지 자기 가슴에 안심이를 꼭 안며 그래서 안심이 배가 이렇게 뚱뚱한 거냐고 물었다. 남의 걱정을 너무 많이 들어서? 나는 아니라고 했다. 얘 뱃속이 크고 둥근 건 아이들에게 나눠줄 희망 보따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 지막으로 아이를 위해 즉석 퍼포먼스도 준비했다. 토끼처럼 긴 안심이 두 귀를 양손에 잡고 높이 치켜들며 만세 삼창을 한 것이다.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엄마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춘기 딸 얼굴에서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올 수 있게. 실제로도 그랬.



우리 집 안심이. 뚱뚱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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