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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Nov 08. 2023

항암 다음날 1만 3천보를 걸었다

그래놓고 한밤의 간장 계란 비빔밥은 뭐냔 말이지

산책의 시작은 저렇게 날씨가 좋았다.



항암 시작한 지 둘째 날은 평소대로 자고 평소대로 일어났다. 6시 45분에 채소와 과일로 아이의 간식 도시락을 챙기고 여분의 채소와 과일로 남편과 나의 아침도 준비했다.  교하  아침이면 늘 1분 1초가 급해서 아무것도 못 먹뛰어다. 러나 아무리 급해도 따듯한 보리차는 한 잔 마시고 가 한다. 몸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깨어 수 있도록. 학교에서는 오전 10시에 30분가량 긴 휴식 시간이 있는데 이때가 아이들의 간식 타임이다. 우리 아이는 아침을 못 먹고 가니 자연스럽게 간헐적 단식을 하고 있는 가 싶기도 하. 뭐든 좋게 생각하는 게 좋겠? 


아이가 가고 남편은 뮤슬리와 채소 과일 한 그릇,  채소 과일을 천천히 먹고 야채 보리 조금 먹었다. 점심때는 <항암사흘단식>을 잘 끝낸 것을 축하하며 김치찌개에 물을 더 붓고 심심하게 데워서 공기 그릇에  두 숟갈 넣어 먹었다. 꿀맛! 그런데 점심 때 먹은 김치찌개가 사흘 죽 단식 후 먹은 것치고는 좀 과했던가 보았다. 점심을 먹고 나서 배가 좀 과하게 부른 느낌이 들었다.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는 집에 단 한 병 남아 있던 마지막 까스 활명수까지 마셨다. 속이 더부룩할 때 마셔주면 금방 속이 가라앉는 나의 최애 드링크. 날도 효과가 좋았다.



우리 동네에 새로 오픈한 유기농 가게.



오전에는 가정의(주치의) 면담이 있었다. 짧은 머리를 하고 나타난 내게 주치의는 생기 있어 보인다 대화를 시작했다. 전날 시작한 암 보고를 마치2년 전 첫 항암 때보다 피로를 덜 느낀다 하니 놀라 기뻐했다. 치의가 동의해 줄 것 같지 않아서 <항암사흘단식>에 대해서는 말을 다. 대신 지난번에도 부작용 없이 잘했으니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하자 주치의가 이렇게 말했다.


"프라우 오, 환자 본인이 그런 확신을 가지고 치료 임는 건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이겨내실 수 있을 겁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지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


진료실을 나갈 때 그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려 주었다. 힘내라는 치의의 마음 같아서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접수대의 간호사들도 이구동성으로 내 짧은 머리가 보기 좋다고 덕담을 다. 이쯤 되면 우리 아이가 말한 내 미용사 파비의 매직나타나는 징후로 봐도 겠다. 처음엔 영 아니올시다였는데 갈수록 봐줄 만해진다는? 주치의에게 압박 스타킹 처방전 받았다. 이 처방전은 1년에 두 번 받을 수 있다. 스타킹 가격은 160유로 정도인데 처방전을 받면 50-60유로 자가 부담고 나머지는 건강보험에서 커버해 준다. 2년 전 첫 압박 스타킹을 주문할 때 양쪽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 사이즈를  후로 번에 다시 재보았다. 그때보다 왼쪽 종아리 조금 굵어 다른 곳은 비슷하다고 했다. 안심이었다. 예전보다 리가 많이 었으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을  때문이다.


압박 스타킹도 주문했고, 2주면 온다고 하고, 오면 연락을 주겠다는 말 듣 숙제를 해치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은 올해 새로 생긴 동네 유기농 마트에도 처음으로 러보았다. 밖에서 볼 때와는 달리 매장 넓고 물건은 많았다. 매대 진열된 제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격이 일반 슈퍼보다 평균 1.5-2배는 비싼 것 같았지만 눈길이  제품도 많다. 유기농 채소 과일부터 없는 게 없는 매장이었다. 일반 슈퍼는 가면 쉽게 지쳐서 가기 싫어하는 내가 유기농 매장은 고객도 적 매장 한산하고 흥미 있는 제품도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 집은 매일 아침 뮤슬리를 먹고 있으니 유기농 우유를 먹는 게 건강을 위해 을 거 같았다. 무거워서 고 집에 와서 남편에게 말했더니 당장 두 개나 사 들고 왔다. 이럴 때는 동작 빠른 남편이 어 좋다.



비 오고 또 해 나고 난리 부르스를 추던 산책길. (하루 지나 보니 한밤의 내 식탐 부르스도 날씨 못지 않았음!)



오후에는 산책을 나갔다. 날이 좋다가 동물원이 나타나기 전 한 차례 소나기가 쏟아졌다. 다행히 윗옷에 달린 모자를 쓰고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이자르 강변 산책로가 아닌 일반 산책로를 택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숲이 우거져 비를 덜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1만 3천보씩이나 걸 생각은 아니었다. 적당히 걸어보고 피로하면 곧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별로 안 피로하잖나. 그래서 계속 걸었다. 뮌헨의 동물원까지. 보통 속도로 걸으면 45분 만에 갈 수 있는데 무리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걸으니까 가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집까지 왕복 2시간. 앱을 확인하자 1만 3천보가 나왔다. 얏호! 아무튼 그날의 산책은 기대도 안 한 성과였다. 항암 다음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 집에 돌아오자 남편과 아이가 축하해 주었다. 저녁은 샐러드와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준비하고, 나는 식빵 샌드위치 한 조각과 삶은 계란 한 개, 그리고 샐러드를 조금 먹었다.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날 밤에 일어난 미스터리 하나. 자정 무렵이었다. 자다가 일어나 간장 계란 비빔밥을 먹은 것이다. 이게 무슨 희한한 일인지. 밤중에 간장 계란 비빔밥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시간에 먹어서 어쩌겠다는 건지. 부엌으로 갔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지어 놓은 따끈한 백미가 밥솥에 있다. 밥은  면 충분했다. 계란 하나. 한 숟가락 뜨고 알았다. 택도 없는 것을. 백미 위에 계란. 그 위에 간장 쪼금. 참기름 많이. 계란 하나를 먹는데 밥은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계란 하나 추가. 행복한 밤, 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잠깐이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욕망인가. 먹어서 안 좋을 걸 뻔히 알면서도 결국 어가다니. 오늘 아침에는 당연히 아무것도 못 먹었다. 속이 편안해질 때까지 따뜻한 보리차만 마시며 지켜볼 생각이다. 또 하나 이번 항암을 시작하 깨달은  내가 물을 적게 마신다는 것. 이거야말로 한밤의 간장 계란 비빔밥보다 중요한 사실이다. 이번 항암 때 반드시 보완해야 할 점이다. 항암한 날엔 특히. 그다음 날도. (보리차만 마시고 침대에 누워있자니 라는  한심해서 안 되겠다. 마침 해도 나오고 있어 조금 걸어야겠다. 걷고 오면 좀 낫겠지?)



점심 때 먹은 김치찌개 한 그릇과 까스 활명수. 한밤의 간장 계란 비빔밥은 먹느라고 바빠서 사진 못 찍음. 다음날 잘라만 놓고 도시락에 넣어둔 나의 아침 식사 채소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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