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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Dec 31. 2023

항암도 산책도 인생도 내 뜻대로 되지는 않더라도

새해엔 새 항암약으로 다시 항암

오른쪽 건물이 내가 입원했던 완화 병동.


퇴원한 다음날 암센터와 미팅을 했다. 남편과 함께 갔다. 난 질문이 적은 반면 독일 사람인 남편은 질문이 많다. 원래도 궁금한 게 많고 호기심 많고 자기 말대로 엔지니어라 앞뒤가 딱딱 맞는 걸 좋아한다. 당 의사는 새로 보는 젊은 여의사였다. 남편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을 해줘서 괜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독일에서 질문은 미덕으로 친다. 나처럼 질문이 없으면 주워듣는 것도 적을 가능성이 다. 한 마디로 손해다.


내가 입원해 있던 무렵에 암센터인 종양센터에서는 내 항암 방법을 두고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이대로는 효과가 없겠다고 판단한 센터 쪽에서 제안한 건 새 항암약으로 다시 해보자는 것. 나는 자궁암이었는데 항암약은 파클로탁셀과 카보플라틴이었다. 주 1회 항암을 했고, 4차 항암을 하는 동안 계속 백혈구 수치가 떨어져 항암약 용량을 줄이는 바람에 효과 적다고 판단한 듯하다. 새 항암약은 난소암과 유방암에 쓰는 약으로 케릭스 Caelyx(독소루비신 Doxorubicin. liposoma)라고 한다.


항암은 4주에 한 번 한다고 는데 그만큼 약이 세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기존 항암약과 잘 맞아서 매주 항암을 해도 머리가 빠지는 것 말고는 항암 부작용이 없었는데 새 약으로 다시 한다니까 조금 긴장이 된다. 얼마나 약이 세면 4주에 한 번까. 생존율이 낮다는 난소암에 쓰는 약이라니 더욱 걱정이 된다. 얼마나 오래 해야 하는 지도 궁금데 확실하게 정해진 건 없 항암을 시작한 후 경과를 보며 결정한다고. 아이고 참. 그래도 몇 회 이렇게 정해놓고 야 줄어드는 맛이라도 있지. 암 때문에 오십 이후 인생이 꼬였는데 항암 치료 역시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럴 때햄릿의 대사를 곱씹는 것도 나쁘지 않. Let be. 순리에 따라야지. 발버둥 친다고 될 일 일인가 이게. 상황이 바뀌면 또 바뀐 상황에 맞게 력질주 수밖에.



퇴원 후 첫날과 둘째날의 아침 식사. 신선한 과일/야채/삶은 계란과 뮤슬리. 뮤슬리엔 과일/견과류/두유를 넣었다.


 항암은 1월 둘째 주부터 하기로 했다. 새해와 함께 바로 시작해도 되지만 아이의 겨울 방학이 12월 넷째 주와 1월 첫째 주로 2주간이기에 아이의 방학이 끝날 때까지 한 주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나 역시 수술 후 회복할 시간 필요하고, 아이와 즐거운 시간 보내고, 항암 식단 고민하 준비  수 있도록 말이다. 가 생각하고 있는 항암 준비는 누룽지와 백김치. 만약 구토와 설사 같은 대표적인 항암 부작용을 겪게 된다면 많은 암환자들이 목 넘김이 좋아 항암 중에도  먹 수 었다는 누룽지와 내가 좋아하는 유산균 가득한 백김치가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퇴원 후아침 신선한 채소와 과일 먹다. 이것도 항암 부작용이 크면 먹기 쉽지 않을 거라 항암 전에 많이 먹어두려 한다. 뮤슬리 과일을 잘게 잘라 넣고 견과류와 함께 먹다. 우유 대신 유기농 두유와 삶은 계란도 먹다. 최소한의 단백질 섭취 차원에서. 아침을 저 정도로 든든하게 먹고 나면 배가 안 고프다. 점심은 가족간단하게 먹는다. 나는 점심과 저녁에도 숭늉을 곁들여 먹는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식구들은 저녁은 각자 해결하고 있다. 남편은 다이어트와 숙면을 위해 늦은 시간에 먹지 않려고 알아서 일찍 고, 아이도 엄마를 도와주려고  챙겨 먹는다. 토스트 에 다양한 토핑을 얹어 먹는 것 같다. 난 일편단심 숭늉. 병원에서 식사량이 줄어서 요즘은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한국에서 언니가 소포로 보내준 소형 무쇠솥. 주말에 고마운 누군가가 대문 앞에 두고 간 달디단 군고구마와 호박죽.


숭늉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제주에 계신 브런치 작가 영끌치유님의 항암 투병기를 읽고 나서다. 이분은 매일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숭늉을 마시며 항암 부작용을 이겨내셨다고 한다. 그리고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라는 책으로 유명한 한의사 화타 김영길 님의 새 책 <병에 걸려도 잘 사는 법>란 책에도 숭늉의 중요함이 나다. 이 책에선 심지어 태운 숭늉의 국물을 마시고 건더기는 버리라고 한다. 숭늉이 몸속의 독소를 빼는 모양이다. 여러모로 안 먹을 이유가 없는 숭늉은 내게 항암 대체 음식 1순위로 등극했다.

 

내가 수술 후 입원해 있는 동안 뮌헨의 우리 집에는 한국에서 보낸 무쇠솥이 도착해 있었다. 한국에 있는 언니가 철분 섭취 중요하 여기다 누룽지 만들어 먹으라고 작은 무쇠솥을 사서 보낸 것이다. 저런 무거운 걸 겁도 안 내고 보내는 강심장이라니.  무겁다고 해서 진짜 안 무거운 줄 알았다! 언니의 정성을 생각해서 매일 누룽지를 만들어 숭늉을 먹고 있다. 주말에는 어느 분이 달달한 군고구마와 호박죽을 끓여 문 앞에 놓고 가셨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반반이었다. 군고구마는 아이가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나와 남편도 부엌을 오가며 몇 개씩이나 집어다.


점심을 먹고 나면 산책을 다. 치 없는 남편이 아침에 해만 뜨면 은근히 산책에 대한 부담 주는 말을 해서 스트레스가 될 때도 있지만 눈치가 없어서 그런 거니 어쩌겠나. 나도 머릿속에 그날의 식사 준비와 산책에 대한 플랜이 다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부담을 주면 눈치가 보여 맘 편히 침대에 드러눕지를 못하잖나. 아프면 괜히 그런 마음다. 암환자가 된 것도 미안한데 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운동을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이에게 고충을 털어놓은 후 위로를 받자 마음이 풀무조건 쉬고 플랜 대로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


생도 항암도 산책마저 내 뜻대로 안 될 때가 지만 의기소침하지는 않기로 했다. 내 뜻대로 안 될 땐 '내 뜻'은 빼고 순리에 따르면 되지. 괜히 민해지고 뾰족해져서 기운 빼지 말고. 알고 보면 내 뜻이란 것도 별 거 아닐 때가 많아서. 디어 2023년도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오늘을 무탈하게 잘 넘기면 또 새해 새날이 온다. 새것이 늘 좋은 건 아니지만 가슴이 뛰는 건 사실이다. 2024년도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걱정은 접고 기대는 펼친 채 기다려려 한.



이자르 강변 산책길. 퇴원하고 매일 30분-1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있다. 이틀은 흐렸고 사흘째 되는 날 오후에 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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