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도 며칠 남지 않은 날에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집에서 새해를 맞고 또 며칠이 지났다. 병원에서 보름간 내가 읽은 책은 건강 관련 책 한 권이 다였다. 책이 문제가 아니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할까. 집에 오자 남편이 물었다. 요즘은 책을 읽지 않느냐고. 그렇다고 했다. 남편이 왜냐고 물었다. 집중이 안 된다고 하자 또 왜냐고 물었다. 그 물음이 성가시고 귀찮았다. 왜긴, 아프니까 그렇지! 울화가 치밀려고 했다. 아니, 그걸 몰라서 물으시나. 지금같은 상황에 책이 뭐가 중요한가. 가을과 겨울에 두 번의 등 수술을 받고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누워만 있다 겨우 회복 중인 중환자에게 말이다.
새해가 지나고 사흘째. 아이와 가발 가게에 들르느라 뮌헨 시내로 외출을 했다. 마음에 드는 가발을 찜해놓고 가게 주인의 조언대로 다음 주에 주치의에게 들러 처방전을 받아오기로 했다. 매년 가발 구입에 보험 적용이 된다고 했다. (나는 정확히 2년 반 전에 그 가게에서 산 가발을 쓰고 갔는데 내 가발을 살펴보던 여사장님이 고개를 흔들며 더 못 쓴다고 했다. 가발 사용 기한은 1년이라고 강조하시면서. 1년은 너무 짧은 거 아닌가?). 그날 내가 본 검은색 가발은 두 가지로 수제 머리는 1,200유로/인조 머리는 600유로였다. 2년 전보다 가발 가격이 더 올라있었다. 보험에서 얼마나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2년 전에는 수제 가발 980유로 중 380유로를 지원받았고, 인조 가발 가격은 기억에 지금보다 훨씬 쌌던 거 같은데. 검은 머리가 희소하기도 하고 이번에 본 가발은 머리 길이가 그때보다 길어서 비싼 건가 싶기도 하고.
스포츠 용품점에도 들러 벼르고 벼르던 초보용 탁구 라켓을 샀다. 가족 운동용으로. 나는 봄쯤 합류할 계획인데 그때까지는 바람 없는 날 셋이 탁구대가 있는 우리 집 앞 공원에 나가 남편과 아이가 치는 걸 구경이나 할 생각이다. 남편은 다이어트, 아이는 게으름 방지가 내가 염두에 둔 목표다. 그게 왜 탁구인가 하면 온 가족이 간단하게 함께 하기도 좋고, 셋 다 못 치니 격렬하고 싶어도 그럴 가능성이 제로다. 아이는 더 몸치라 우선은 공을 라켓에 맞히고 테이블 위로 넘기는 연습부터 필요할 것이다. 내가 합류할 봄까지 아마도 운동의 팔 할은 탁구공 주우러 다니기가 될 것 같다. 여담인데 내가 건강할 때 아이와 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친 적이 있는데 배드민턴 채에 공을 맞히는 게 그렇게 어려운 동작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아이가 공을 못 맞히는거다.그런 코메디가 없었다. 웃다가 배꼽 빠지는 줄. 그게 그렇게 어려울 일인가. 탁구는 라켓도 공도 사이즈가 더 작으니 더 난항이 예상된다. 격렬하게 웃는 건 내 몫이 될 듯.(구매 가격은 라켓 2×공 3=20유로×2세트= 총 40유로.)
새로 산 탁구채 4개와 탁구공 6개.
넷플릭스 시리즈: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아이와 마리엔 플라츠의 서점 후겐두벨에도 들렀다. 3층 북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쉬기 위해서였다. 북카페의 안락한 소파에 앉으니 나 역시 건강했던 코로나 이전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도 이 북카페를 참 좋아했었지. 와이파이가 잘 없는 독일에서 이 북카페의 무료 와이파이는 항상 반가웠다. 책을 고르는 아이를 기다리며 넷플릭스에서 곤도 마리에의 정리의 기술<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시청했다. 새해에 다시 시작할 새 항암 주기가 4주라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민하다가 생각난 게 집정리였다. 매달 옷과 책과 소품 등을 한 가지씩 정리하기. 우선 내 물건부터 시작하기. 병원에 있을 때 내가 더 아프기라도 하면 나중에 뭐가 제일 마음에 걸릴까 생각해 보았다. 단연 집 정리였다. 집으로 간다면 꼭 시도해보고 싶었다. 정리정돈은 단순히 물건을 줄이는 차원뿐만 아니라 내 암치료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심리적 혹은 정서적 안정 같은 형태로.
예정에 없던 책 읽기 프로젝트는 저녁에 읽고 싶은 책이 생각나서 책꽂이에서 4권을 뽑다가 정했다. 오, 한 주에 한 권씩, 한 달에 네 권씩 읽으면 되겠네. 항암 부작용이 클 땐 절반으로 뚝 잘라 한 달에 두 권도 괜찮고. 예상치 못한 새해 독서 계획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남편의 물음에 다시 책 읽기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1주일. 역시나 답은 시작도 끝도 책 읽기였다. 새해가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세 가지 플랜을 뚝딱 정했다. 새해 계획이자 새 항암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이고 나니 꽤 마음에 들었다. 가족 탁구. 집 정리. 매달 독서. 다시 정리하다 보니 항암 버킷 리스트처럼 들리기도 한다. 일단 목표를 6차 항암까지로 정하고 6개월간 해보기로 했다.
사람은 목표가 있어야 한다. 장단기 목표로나누어 작은 성취감을 계속 쌓아갈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새해가 밝았는데 새해에 걸맞은 계획이나 목표 한두 개 정도는 있어야 맛이지. 항암 자체가 목표가 될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항암에만 빠져들 위험성이 있어서. 수시로 바뀔 감정과 기분을 컨트롤하려면 항암 기간 동안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계획을 동시에 세우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암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는 데는 역시 독서 만한 것도 없겠다. 생각해 보니 남편의 질문이 나를 독서로 돌아오게 했는지도 모른다. 매일 오후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집을 나서게 되는 산책처럼. 배우자와 아이의 말을 잘 듣는 것도 올 한 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새해엔 그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더욱 세심하게 경청할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