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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an 10. 2024

프라우 오,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독일의 주치의가 물었다

항암 전날인 월요일에 피검사를 하러 병원에 가던 아침. 뮌헨에는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독일의 겨울방학이 끝났다. 아이는 2주가 짧아도 너무 짧다고 입이 댓 자나 나왔다. 며칠 전에는 이런 말도 했다. 엄마, 왜 학교에서는 쓸데없는  배우지? 이게 꼭 필요해? 그러게 말이다. 나도 예전엔 딸과 같은 생각이었다. 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된다고 허구한 날 죽어라 외우고 시험에 목숨을 걸었더란 말인가. 그런데 학교 다닐 때가 아니면 쓸모없는 것을 배우고 익힐 기회도 없더라는 거지. 쓸모없는 것에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 뇌의 여유가 살아가면서 다시 찾아오지 않. 그걸 또 그때 배우면 딱히 다른 걸 배울 것도 없. 쓸모 있는 뭔가를 찾아 자기 길을 가지 않는 한. 그것 역시도 쉬운 건 아니다. (직히 마음은 이랬다. 엄마도 몰라, 배울 만하니까 배우는 거겠지. 잔말 말고 그냥 배워! 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솔직히 항암 고민보다는 쉽잖나..)


월요일 아침 아이는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했다. 당연하지. 2주나 아침 10시에 일어나다가 갑자기 개학이라고 몸이 말을 듣겠는가. 아침 7시에 일어나라고  도시락과 물병을 들고 아이방으로 가니 7시 19분. 아이는 그때까지 자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11분의 여유가 있었다. 나라면 11분으로 어떻게든 하겠건만 독일의 피가 반이나 섞인 아이에게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난리법석을 떨더니 7시 39분에 총알같이 달려 나갔다. 간만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아침이었다. 전날은 하루종일 진눈깨비가 내리고 쌓이더니 밤새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길이 어붙었을 것 같았다. 넘어지지만 않는다8시까지는 교실착할 수 있을 다.


방학 내내 아이가 공부라는 걸 는 꼴은 못 봤다. 자기 말대로 방학이니까. 그런데 개학하면 시험이 줄줄이 있을 텐데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사는 건지, 잔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나는 나대로 새 항암을 앞두고 있어서 신경을 껐다. 머리 있겠다, 몸과 마음 건강하겠다, 그러면 됐지. 거기다 사춘기인데 성질 자주 안 내지, 엄마랑 K드라마 같이 보며 가끔 놀아주니까 고맙지. 아참, 개학 전날밤에도 사달이 날 뻔했다. 아이가 저녁에 내가 며칠 전에 내다 버린 큰 마분지를 찾는 게 아닌가. 개학날 들고 가야 하는 숙제라. 5주 동안 미술 수업 때 그린 거라. 에휴, 쓰레기 분리수거함에 내려가보니 깨끗하게 수거해 가버린 후다. 미안한 마음으로  오니 이는 화도 내지 않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들은 엄마보다 다. 솔직히 자주 그렇다. 선생님께 엄마가 갖다 버렸다고 꼭 일러바치라고 했다. 래야 내가 덜 미안할 거 같아서. (실은 크게 미안하지는 않았다. 안 물어보고 버린 잘못은 인정하지만. 미술 점수 좀 못 받으면 어떤가. 그런다고 세상이 끝장나지는 않니까.)



아이의 개학날 아침 우리 집 발코니에도 눈이 쌓였다.


월요일 피검사 결과는 좋았다. 얼마나 좋은 지는 안 물어봤다. 간호사가 말하는  곧이곧대로 믿고 안심하고 돌아와 곧바로 주치의를 방문했다. 주치의에게는 두 번째 수술 경과를 보고하고, 몇 가지 부탁할 일도 있었다. 가발 처방전과 등 재활을 위한 물리치료 처방전을 받는 일. 둘 다 오케이였다. 그날 주치의가 궁금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난 3년 간 그는 내 항암 과정을 계속 지켜보면서 여러 모로 도와주었다. 나는 항상 밝았고 건강했다. 외면도 내면도. 그날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실제로도 그랬다. 항암은 다음날이고, 단지 피검사를 하러 가는 것뿐인데 나는 아침부터 무척 긴장이 되었다. 전날 내린 눈과 영하로 떨어진 기온으로 길이 꽁꽁 얼어붙어서 남편이 차로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차 안에서도 계속 심호흡 했다. 뭐가 그렇게 불안했을까.



"프라우 오, 지금은 어떠십니까?" 주치의가 물었다.


"다행히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선생님. 첫 번째 수술 때보다 회복 속도 느리고 마비도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요. 가장 기쁜 건 3년 전 암을 선고받았을 때 열 살이던 제 딸이 지금은 열세 살이 되었고, 새해에 곧 열네 살이 된다는 거예요." 가 말했다.


"따님은 좀 어떻습니까?"


"제 딸은 안심하는 거 같아요. 엄마가 잘 해낼 거라고 믿고 있고요. 처음엔 충격이 컸겠지만요. 제가 딸 앞에서는 엄청 씩씩하고 용감한 체를 하거든요."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프라우 오? 당신의 마음요. 진짜로 괜찮나요? 겉보기처럼 마음도요?"


정곡을 찌르는 주치의의 질문을 받자 일단은 멍했고, 그다음에는 갑자기 눈물이 아졌다. 급히 손수건을 꺼내 눈물 콧물을 닦느라 잠시 아무 대답도 못했다.


"사실은 괜찮지 않아요, 선생님. 이번 항암은 많이 두려워요. 제가 부작용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아이가 보게 될까 걱정돼요. 아이가 불안해할까 싶어서요."


"그런 마음을 종종 밖으로 표현하시나요? 그것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으신가요?"


"네, 제 남편요. 남편 앞에서는 가끔씩 울어요."


"다행입니다, 프라우 오. 저도 프라우 오를 언제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기억해 주십시오. 제 도움이 필요하실 땐 언제라도 오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너무 잘해 오셨듯 앞으로도 프라우 오가 잘하실 거라 저는 믿습니다. 희망을 놓지 마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



마지막 주치의 말에 감동받은 나는 손수건으로 또다시 눈물을 찍어내며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는데, 목이 메 인사말이 제대로 나왔 모르겠다. 나 방금 정신과 치료를 받고 나온 건가? 계단을 내려오 안도감 때문인지 오전 내내 불안했던 기분이 사라졌다. 찜해 놓은 가발과 물리치료 처방전이라는 두 개의 도움을 부탁하러 갔다가 영혼을 위로받고 나온 이 기분은 뭐지? 평소 말씀이 많은 분도 아니고 목소리 톤도 낮은 편이어서 그분의 독일어를 알아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는 편인데. 그만큼 지금까지 대하기 편안한 분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점심때였는데 배고픈 줄도 모르고 버스를 타고 가발 가게로 달려가 처방전을 주고 왔다. 가게 직원과 명랑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온 걸로 봐서도 주치의 방문을 변곡점으로 새 항암의 전조는 불안에서 '덜' 불안으로 바뀌기 시작 게 틀림없다. 뭐지, 새해부터 좋아질 거라더니 진짠가? 사방에 귀인은 생각보다 널렸나 보다. 우리가  못 알아봐서 그렇지..



피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병원의 대기실 룸의 발코니에도 흰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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