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화병동으로 오던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간밤부터 내 침대 머리맡엔 금식이란 푯말이 붙었다. 초음파 상으로 쓸개 쪽에 문제가 보여 스텐스인가 뭔가를 한다는 날이었다. 나 역시 정확하게 그게 뭔지 인지를 못해서 전날 언니에게 알려주지 못했다. 그날 아침 시술은 못했다. 수술실인가 검사실 인가로 내려갔다가 1시간 동안 대기만 하다가 돌아왔다. 담당 의사는 젊었는데 얼굴과 목소리가 둘 다 좋았다. 거기다 직업까지 세트로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말하길 나는 복부 오른쪽(쓸개 쪽)에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려움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 나타나는 어떤 증상도 없으니 지금 당장 시술을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어떤 수술이나 시술에도 리스크는 따른다. 이것은 미용 시술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설명했다. 나 역시 시술을 안 해서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다시 병실로 돌아오자 간호사가 와서 내 짐을 챙기며 말했다. 완화병동에 자리가 나서 옮길 거라고. 타이밍도 어찌 이리 딱딱 잘 맞나 싶었다. 아침을 못 먹어서 배도 고팠는데 완화병동 가서 빵이라도 달라고 하면 주겠지 싶으니 더 신이 났다. 일단 어제 말한 대로 2인실로 배정, 자리가 나면 언제든지 1인실로 옮겨 주겠다니 더 땡큐였다. 저, 아침을 못 먹고 와서 그러는데요, 빵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이때 빵이란 독일 빵을 말한다. 독일 모닝빵. 겉은 딱딱하고 속은 보드라운. 달지는 않고. 여기에 버터를 발라 우유를 넣은 커피에 찍어먹으면 넘 맛있다(다행히 잼은 안 바른다!). 요즘 건강 이런 거 안 따지고 먹는다. 너무 행복하다. 이렇게 맛있는 빵을 먹고 있자니 언니 생각이 났다. 시술할 뻔했다고 하면 놀라겠지? 근데 안 했다고 하면 더 좋아하겠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다. 시술의 시옷 자도 꺼내기 전에 완화병동으로 옮겼다는 내 말을 듣자마자 언니는 다급하게 물었다. 니가 왜 거기 가 있냐고. 의사가 옵션을 주길래 선택했다고 하면서 시술 얘기를 꺼내고 간 전이 가능성도 나왔다. 그러자마자 언니가 무섭게 울기 시작했다. 니 혹시 어디 많이 아픈 거 아니냐고. 아니라고, 시술 안 하기로 하고 오전에 여기로 넘어와서 빵 맛있게 먹다가 전화한 거라고 해도 언니는 믿지 않았다. 이모야, 울지 마쩨요. 이모야가 울면 나도 울고 싶쨔냐요. 어리광을 부려도 통하지 않았다. 언니는 말했다. 니, 지금 당장 스피커폰 끄고 페이스톡 해라! 당장 언니의 의도를 알아챈 내가 한번 더 어리광을 부렸다. 왜요? 동생 얼굴 보고 바로 상황 파악 하시려꼬요? 시끄럽다, 빨리!(우리 언니는 내 목소리, 내 얼굴만 보고도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는 신기한 초능력을 가졌다. 숨길 수가 없다.) 그날 언니는 영상 통화를 하며 빵을 맛있게 뜯어 먹고 있는 내 모습을 찬찬히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을 했다.
남편이 매일 가는 카페 좀마의 카푸치노.
그날 저녁 우리 딸이 또 전화를 했네.
엄마, 괜찮아?
엄마, 안 괜찮아.
왜?
우리 딸 보고 싶어서, 흑흑!
에공, 내일 보러 갈게. 괜찮지?
안 괜찮아. 흑흑!
그럼 어떡해. 오늘은 벌써 늦었는데. 지금 가?
그니까, 저녁 8시에 약 먹고 확 자버릴 거야!
(키득키득)
딸에게 이모 흉도 보았다. 세상에, 너희 이모가 그렇게 울잖냐 엄마 무섭게! 그러다가 또 엄마 얼굴 보게 페이스톡 하잖다, 더 무섭게!! 아 진짜 너희 이모 왜 그러냐. 오늘 이모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딸은 계속 웃으며 듣고 있다. 엄마 말이 맞네, 우리 이모 무섭네, 맞장구도 쳐주면서. 그러다가 내가 묻는다. 우리 딸은 괜찮아? 고민 없어? 없단다. 어떻게 고민이 없지, 청소년이. 그럼 이 네 가지 중에 한 가지인데.. 딸이 그 네 가지가 뭐 냔다.
1. 짐승
2. 동물
3. 천사
4. 모르겠다
친절하게 내가 답을 알려줬다. 내 딸이 짐승은 아니니까 1번 탈락. 동물도 아니니까 2번 탈락. 사지선다 역사상 모르겠다가 답인 적은 없었으니까 4번도 탈락. 그러니까 답은 3번이네. 그러니까 내 딸은 천사가 맞네. 그러니까 엄마는 천사 엄마인 거네.
(키득키득)
요즘은 딸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를 더 자주 하고 있다. 주로 밤에 잘 자라고 인사하러 올 때 그리고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받을 때손키스와 함께 날린다. 다음은 전화할 때. 언제 어디서건 전화의 마지막 멘트는 사랑해 세 번으로 마무리(만세 삼창도 아니고..). 딸도 익숙해졌는지 엄마가 세 번 연속으로 빠르게 사랑해를 외치면 한 번 정도는 화답해 준다. 말의 질량의 법칙을 믿는 거지. 평생 해야 할 '사랑해'를 초집중적으로 초스피드로 말하기. 남은 생이 얼마가 될지 몰라서. 아 진짜, 슬프게 마무리하려고 한 거 아닌데 왜 이러지 나..
우리 셋, 지난 여름 서울에서 저렇게 행복했쟈나!(내 머리 가발 아님 주의! 오른쪽이 접니다,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