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니었다. Y의 고민은 그녀를 단 반년만 진득하게 지켜볼 수 있으면 안다. 워낙 처세술이 없어서 남들은 석 달만 지켜보면 견적이 훤하게 나올 일을 Y는 그 두 배를 지켜봐야 알게 된다. 톡만 해봐도 안다. 이모티콘도, 그 흔한 스마일 표시도, 하다 못해 남들 수시로 사용하는 'ㅎㅎ'나 'ㅋㅋ' 조차 없다. 그게 반복되면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혹시 지금 나랑 톡 하는 게 맘에 안 드나?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나는 좋았다. 그런 겉치레 없음이 Y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8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직장에 다니는 윤을 배려한 뮌헨의 문학모임 주말 번개였다. Y는 세 가지 김밥 재료를 준비해놓고 우리를 맞이했다. 그것만 준비했다면 말도 안 한다. 잡채에, 국에, 백김치에, 새콤달콤 양배추 샐러드에. 근래에 그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간만의 모임에 민폐가 될까 봐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가려는 내게 Y가 말했다.
"언니. 알리시아 김밥이랑 잡채 자주 못 먹지 않나요. 실컷 먹게 꼭 데리고 오세요."
그 말은 맞았다. 김밥은 조카가 와서 한 번 해줬고, 잡채는 언젠가 내가 한 번 한 게 다였다. Y의 마음이 고마워 망설임 없이 그러겠노라, 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라 해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Y의 집은 뮌헨의 남쪽인 그륀발트에 있었다. U반과 S반은 없고, 트람을 타야 했다. 시부모님이 사시던 정원이 있는 집이었다. 남편이 그 집에서 자랐다고 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여곡절 끝에 Y와 남편이 그 집으로 들어갔다.
넓은 정원의 한쪽 끝에는 나무 벤치가 있었다. 그 벤치를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고 했다. 거기 앉아 글을 쓰는 내 모습이. 그런 말은 진심이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말만 들어도 안심이 되었다. 이런 친구가 하나 있으면 외국 생활도 그럭저럭 견뎌질 것 같아서.
그야말로 배가 터지게 먹었다. 김밥이 얼마나 뚱뚱한지 하나만 집어먹어도 입 안이 꽉 차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김밥은 이래야 한다. 날씬하면 못 쓴다. 더 마음에 든 건 Y의 매너였다. 테이블 위에 김밥 재료를 세팅한 후 즉석에서 말고 썰어서 한 입씩 맛보게 했다. 샐러드 김밥, 소고기 김밥, 참치 김밥, 세 가지 다 얼마나 맛있던지 우리는 냠냠 소리도 낼 새 없이 써는 족족 냉큼 집어먹었다. 양도 충분했다. 김밥을 실컷 먹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재세팅 후 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어떻게 그렇게 끝도 없이 들어가더란 말인가. 그러니 점심이 끝난 후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꼬박꼬박 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요즘 나는 잠이 부족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다 같이 잠이 들면 자정 넘어 혹은 새벽에 잠이 깼다. 그렇게 깨면 다시 잠들기가 어려웠다. 물론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빈 방으로 건너가 글을 쓰면 되니까. 그러다 졸리면 다시 자면 그뿐이었다. 그래도 수면 부족인 건 맞았다.
노인네도 아니고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서 졸다니. Y는 그래 놓고도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생긴 건 정말 깔끔해서 아닌데.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한 몸에 머리도 빈틈없이 뒤로 넘겨 묶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까칠하게 볼 수도 있었다. 그런 Y가 베를린에서 스시집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랑 태국에 살 때 만난 친언니의 친구 이야기를 할 땐 배꼽을 잡았다. 잠은 벌써 달아나고 없었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사이 잠 깨는데 도움이 된다며 시부모님의 유품인 멋진 엔틱 수납장을 열고 도수 높은 달달한 술이랑 기타 등등과 과일을 끝도 없이 꺼내 왔다.
오후 다섯 시쯤 남편이 전화해서 실컷 놀다 오라 했다. Y의 남편 역시 오전 11시에 우리를 역에서 픽업한 후 자기는 지하 공간으로 사라져 줄 테니 재밌게들 놀아라 했다. 그들의 격려와 배려에 힘 입어 저녁 7시가 되도록 정말이지 대책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떠난 후 간만에 한국 친구들과 즐거웠던 아내가 흐뭇했던지 Y의 남편이 토요일 번개 얘기를 몇 번이나 꺼내더라는 얘기를 며칠이 지난 뒤 Y에게 전해 듣는 일마저 즐거웠다.
김밥에도 세 가지 색이 있을까. 자유 평등 박애의 삼색이. 그럼 나는 어느 색의 손을 들어주게 될까. Y의 저 자애롭고 평등하고 박애적인 김밥은 대체 무슨 색일까. 저기도 레드, 화이트, 블루? 난 어떤 색 김밥에 가장 먼저 손이 갈까? 회원 중 한 명인 희가 한국에 가는 바람에 빠져서 자꾸 마음에 걸린다고, 희가 돌아오면 다 같이 또 한 번 자기 집에서 만나자는 Y의 말만 들어도 가는 팔월이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