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준비물을 사러 가자는 나의 시어머니이신 친할머니의 연락을 받은 건 이틀 전이었다. 얼마 전 남티롤로 여름휴가를 다녀오신 후였다. 금요일인 오늘 오전 알리시아와 중앙역에서 S반을 타고 뮌헨의 남쪽 호숫가 휴양도시인 슈탄베르크 Stanberg로 갔다. 잔글씨가 빽빽한 준비물 종이를 꼼꼼하게 체크하시던 할머니가 드디어 문방구점 주인장을 큰소리로 부르셨다.
"여기요, 저희 손녀애 준비물 좀 도와주세요!"
독일 할머니들께도 이게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준비물 내역은 꽤나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큰 파일과 작은 파일은 여섯 가지 칼라가 지정되어 있었고, 어떤 연필과 만년필은 무슨 잉크 색을 사야 하는지, 그리고 컴퍼스까지 사라고 적혀 있었다. 잘 모르는 내가 들여다봐도 정신이 없긴 했다. 문방구 안이 얼마나 잘 정리 정돈되어 있던지 그걸 감상하랴 사진 찍으랴 나는 할머니와는 다른 이유로 바빴다. 필통이나 필기구, 신발주머니나 미술용품 중 이미 사용 중인 건 다 제외하고 신속하게 사고 문방구를 나왔다.
아들 둘 딸 하나 총 셋을 키우신 어머니지만 그때와 지금은 준비물 내용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만 사는 데도 100유로가 넘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가난한 애들은 이런 준비물을 어떻게 다 사는지 모르겠다신다. 어머니 시절엔 반 애들이 20명이면 그중 두어 명의 가난한 집 아이들을 위해 돈을 조금씩 거둬서 똑같은 준비물을 사 주었다고. 그때로부터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어머니께서 학교 다니시던 때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 정서가 비슷해 보였다.
은행 앞 주차 공간에 주차를 하신 어머니가 운전석에 앉으시며 말씀하신다.
"내 정신 좀 봐라! 주차표도 안 사놓고 내렸지 뭐냐. 딱지 안 끊긴 게 천만다행이다.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는데."
나는 큰소리로 웃는다. 이런 때 나는 시어머니가 귀엽다. 기억력이 얼마나 좋으신지 옛날 일을 날짜도 장소도 잊으시는 법이 없는 분이 길가의 작은 주차용 기계에서 주차표를 사서 운전석 앞에 두는 걸 깜빡하신 것이다. 주차 장소에서 주차표를 안 사놓으면 벌금은 15유로, 불법 주차일 경우 35유로란다. 집에 돌아온 후 문방구에서 사 온 걸 모조리 꺼내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린다. 이런 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신 즐거움인가 보다.
점심도 전에 같이 에스프레소 한 잔 하겠냐고 물으신다. 다 같이 한 잔. 식사 후에도 당연히 에스프레소 한 잔을 또 같이 마셨다. 하루에 커피를 얼마나 드시는지 여쭈니 1일 세 잔 드신단다. 아침에 잠 깨자마자 1잔. 아침 식사 때는 홍차. 오전에 1잔, 그리고 오후에 또 1잔. 친구분들 중에는 오후 4시경 쿠헨과 함께 딱 1잔만 드시는 분들도 있단다. 나머지 시간엔 홍차만. 역시 불면증 때문이란다. 여기서 잠깐 드는 의문. 홍차는 괜찮나?
오늘은 어머니가 안 쓰시는 이불보와 베갯보를 챙겨놓으셨다. 대놓고 가져가라고 하시지는 않고 보고 맘에 들면 가져가라 신다. 아니면 동유럽의 친척에게 보내신다고.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챙겨 온다. 이런 게 다 어머니 마음이 아니고 뭐겠나. 어머니께서 이불보 핑계로 나를 부르신 건 남티롤에서 사 오신 가을용 쟈켓을 주시려는 것. 양아버지한테는 시누이한테 받았다 하라시며 너한테 선물 주는 걸 싫어하셔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게 나을 때도 있단다. 내가 말했다.
"그럴게요 어머니, 옷이 너무 마음에 드네요. 감사합니다."
그게 뭐 어렵다고. 사람 사는 곳의 이치는 어디나 똑같다.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고심해서 고르셨을 게 틀림없을 남티롤의 회색 쟈켓은 어머니의 마음처럼 가볍고 따뜻했다. 8월 중순 어머니의 생신날에 찾아뵈었을 때 아들에게도 선물을 주고, 학기 전 손녀에게도 선물을 줄 계획이었는데 며느리에게는 아무것도 줄 게 없어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잊지 않고 휴가지에서 선물을 사 오신 마음이 감사하다. 오늘 어머니의 점심 메뉴도 열심히 보고 찍었다. 맛은? 언젠나 기대에 어긋나는 법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p.s.
요즘 양아버지와도 사이좋게 지낸다. 뭐든 좋게 들으려고 하니 좋게 들린다. 오늘은 생선요리라 포크와 나이프를 평소와 다르게 쓰는 거라고 설명을 덧붙이신다. 포크는 짧고 넙적하고 나이프는 칼날에 톱날처럼 써는 부분이 없다. 고기를 썰 때처럼 그 부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감자는 18세기 때 통치자인 프리드리히 2세가 서민들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수입한 후 곳곳에 심게 해 주식이 되게 해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그 말씀에 감자에 대한 무한 애정이 느껴진다. 독일은 감자 종류가 꽤 많다. 오늘은 소금을 넣고 삶은 알이 좀 작은 감자다.
연어는 팬에 올리브유를 넉넉하게 두르고 뜨겁게 달군 후 넣고 소금, 후추, 겨자, 밀가루를 뿌린 후 뚜껑을 덮고 익혔다. 접시에 낼 때는 파슬리와 레몬을 곁들이고 레몬을 연어에 뿌려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