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의 여름휴가
내가 사랑하는 뮌헨이 조카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다. 한두 해가 아니라 오래오래 같이 살 수 있게.
"잡채 면은 삶니, 볶니?"
아이의 개학날 조카에게 톡을 했다. 점심때였다. 집에는 쌀도 라면도 국수도 없었다. 이런 날일수록 한국 음식 생각은 왜 더 간절해지는지. 어디선가 당면을 봤는데 어디 있더라. 당면은 용케 찾았다. 조카가 지난번에 잡채를 해주며 면발을 쫄깃하게 하는 방법을 일러준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났다.
조카가 냉장고에 있는 야채까지 다 들고 왔다. 쌀이 떨어졌다고 봉지쌀까지. 그리고 나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료는 재료대로 썰어서 볶고, 간장 양념장을 만들어 부어가며 불려놓은 당면을 볶은 후, 그 둘을 척척 섞으니 끝이었다. 조카가 내게 알려주었던 비법이란 당면을 삶지 않고 물에만 불려 볶는 것이었다. 그래야 당면 면발이 살아있다나. 나 역시 한 눈 팔지 않고 자세히 보고 적고 사진을 찍어두었다.
지켜볼수록 운도 좋고 인복도 많은 조카다. 성격이 좋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내가 조카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마디로 무던하다. 까칠하고 뾰족한 데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보면 볼수록 예쁘다. 요즘 알바를 하고 있는 한국 식당에서도 주인장이 오래 같이 일하자고 했단다. 이런 타입은 어딜 가나 사랑받는다. 나서거나 나대지 않으면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타입이니 어떻게 사랑받지 않을 수가 있나.
전날에는 점심때 조카를 불러 밖에서 밥을 먹었다. 밥만 먹고 헤어지기는 아쉬웠다. 아이도 간만에 만난 언니와 더 있고 싶어해서 조카도 좋아하는 독일식 도너츠 카페에 들르기로 했다. 배가 불러 도너츠 종류는 시키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가을답게 날씨는 선선하고 햇살도 좋은 9월의 오후였다. 맘 맞는 조카와 아이와 어슬렁어슬렁 마켓을 걷다가 가든이 내려다 보이는 2층 발코니 카페에서 카페 한 잔을 마시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한가하고 느긋하고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이런 오후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조카는 8월 말에 2주간 여름휴가차 이태리 이스끼아 Ischia를 다녀왔다. 뮌헨에서 함께 사는 룸메인 이태리 여자 친구가 집으로 초대를 했단다. 친구의 집은 나폴리였다. 카페에서 조카의 휴가 이야기를 들었다. 조카의 친구는 다섯 남매로 그중 셋이 뮌헨에 살고 있었다. 친구가 조카만큼 성격이 좋다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형제가 다섯이라면 크면서 사회성은 다 배우고 길렀겠다. 삼시 세끼 얻어먹기가 미안해서 한 번은 밥 먹고 테이블 치우는 걸 도와드리려 하자 친구의 엄마가 화를 내시며 일갈하셨단다.
"너희는 쉬는 게 일이고, 밥하고 상 차리고 치우는 건 내 일이야. 그러니 손도 대지 마!"
맘마미아! 이런 게 엄마 마음 아니면 뭔가. 객지에서 돈 버는 자식이, 그리고 그 자식과 방세를 나누며 산다는 친구가 엄마는 안쓰러운 것이다. 그래서 집에 온 양 푹 쉬고 자고 놀다 왔단다. 이스끼아는 나폴리에서 배로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작고 아름다운 섬이다. 편도 배 가격은 12유로. 그곳에 사는 친구의 사촌집을 방문해서 며칠을 머물렀단다. 이스끼아는 물 반 고기반이란 말처럼 현지인이 반 관광객이 반이었다. 햇살이 얼마나 강한지 해변에 한 번 나갔다가 살갗이 다 탔다나. 그 유명한 카프리 섬도 가깝다고.
조카가 로마에서 어학 연수를 할 때 어학 강사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이태리에서 외국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단다. 오전 11시 이후에 카푸치노를 주문하는 사람은 100% 관광객이라나. 그럼 현지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마실까. 우유가 든 카푸치노는 그들에겐 아침 식사용일 뿐. 오전 11시 이후엔 무조건 에스프레소란다. 믿기 힘들지만 현지인들만 가는 어떤 카페엔 오후 시간대에는 메뉴에 카푸치노가 아예 없는 곳도 있다나. 제일 피해야 할 이상한 행동 하나만 들자면 런치나 디너 때 음식과 카푸치노를 동시에 주문하는 거란다. 외국인인 우리가 신경 쓸 일은 물론 아닌 것 같지만.
내 경우엔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친구들에게 불고기를 해줬더니 남미에서 온 남자애 하나가 자기가 즐겨 먹던 비스킷을 들고 나와 거기에 불고기를 얹어 먹는 걸 보고 그 응용력과 순발력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는데. 에스프레소와 같이 나온 물 한 잔은 커피 전에 마시는 입헹굼용이라 한다. 에스프레소 맛을 잘 음미하기 위해서라나. 그럴 수도 있겠고 이태리 커피를 마신 후 입냄새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거야 원하는 대로 마시면 되겠고 에스프레소에 딸려 나오는 물 한 잔이 무료라는 것만 기억하면 되겠다.
휴대하기 좋은 모카 포터도 원래 남부 사람들만 쓰는 것이었다 한다. 예전에 나폴리 아랫지방 사람들이 밀라노로 올라갈 때 꼭 들고 가는 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모카 포터와 덩어리 모짜렐라 치즈였다고 한다. 남부 쪽 모짜렐라가 훨씬 맛있다고. 조카가 먹어 본 나폴리의 모짜렐라 치즈는 정말 맛있었다니 사실인 모양이다. 이번에 조카가 현지에서 배운 모카 포터로 에스프레소를 맛있게 뽑는 비결 중 하나는 커피 가루를 소복하게 담아 꾹꾹 눌러서 닫는 거라나. 조카와 수다랑 떨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내가 사랑하는 뮌헨이 계속 조카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다. 한두 해가 아니라 오래오래 같이 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