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서울에 살 때 우리 집 정말 좋았어. 2층엔 맛있는 알밥 집도 있고, 1층엔 떡볶이집, 오뎅, 만두집도 있고, 우동과 자장면집도!"
흠흠, 어찌 된 애가 입만 열면 먹는 타령인가. 엄마가 맛있는 라면도 끓여주고 간혹 떡볶이나 국수나 아주 가끔은 잡채나 떡국까지 해 줄 때도 있건만. 어제는 조카와 집에서 지하철로 한 코스 떨어진 대형 아시아 마켓에 가서 부추만두도 사 와서 삶아줬는데.
아이 말처럼 솔직히 서울에 살 때 '집'이 좋았던 건 아니다. 복층 오피스텔에 살았으니까. 소음과 먼지 잔뜩 나는 작업 공간이 필요하다는 남편 때문에 지하 주차층에 창고용 공간을 임대할 수 있고, 복층이라 주거용은 천장이 높다고 남편은 만족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괜찮았는데 점점 클수록 물건이 늘어난다는 점이 문제이긴 했지만.
"놀이터도 있고, 교대도 있고, 꽃 카페도 있고..."
아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의 공간을 들여다보는 즐거움. 어떤 건 엄마와 겹치기도 하고 어떤 건 독자적이다. 나는 놀이터 앞 한살림에서 사 먹던 계란과 두부와 콩나물을 잊지 못한다. 아이와 내가 꽃 카페라 부르던 카페 시다모에 들락거린 지도 수년이었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편안하던 주인장 언니를 나는 좋아했다. 주인을 닮은 꽃들은 또 얼마나 우아하고 기품이 있던지. 알리시아가 선물 받은 꽃도 여러 송이였다. 어느 해 오월에 카페 출입문 양쪽에 서 있던 다알리아의 아름다움은 잊기 힘들다.
시다모 옆 지하 식당 교대 밥상도 즐겨 다닌 곳이다. 거긴 주로 연지네와 갔다. 놀이터나 교대에서 애들을 실컷 놀게 한 후 늦은 오후나 이른 저녁을 먹었다. 고등어구이도, 해물된장도, 김치찌개도 맛있었다. 무한 리필이 가능한 밥과 반찬과 가격까지 만족스러웠다. 아이들이 좋아한 건 옛날식 돈가스. 셋째 연희가 태어난 후에는 연지 엄마와 자주 가지 못했다. 서초를 통틀어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그녀는 제육볶음을 좋아했는데. 알리시아가 제일 사랑한 사람도 당연히 연지 언니였다.
내가 좋아하던 남자애도 생각난다. 이름이 현우였다. 개구쟁이 현우는 얼굴만 봐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는 아이. 우리 집에서 놀이터 가는 길에 살았다. 알리시아보다 한 해 먼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바람에 놀이터에서 자주 보지는 못했다. 놀이터 앞에 살던 지은이도 생각난다. 카리스마가 있어 동생들이 나타나면 좌르르 엮어 놀 줄 알던 지은이는 영어를 정말 잘했다. 현우 맘도 지은 맘도 친하고 싶었지만 직장맘이라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랑 히말라야로 떠난 희윤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우리보다 먼저 폴란드로 간 동하네와 뮌헨에서 재회한 것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독일로 오기 전 겨울에는 집 옆에 새로 오픈한 빵집 카페도 생각난다. 너무 추워서 멀리 가기 힘들다고, 빵이 맛있다고 언니와 형부가 즐겨 다니던 곳이었다. 언젠가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어 점심때 불렀더니 총총 달려 나와 비싼 통삼겹과 갓 지은 가마솥밥을 사 주던 친구도 생각난다. 예술의 전당의 카페 모차르트. 여름도 겨울도 좋았던 그곳.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송별회를 해주던 소중한 사람들. 예술의 전당 골목길 이자까야. 걱정 마시라, 당신과 거닐던 시간들도 기억하고 있다. 장소는 잊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