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간 독일의 시간

편지 14

by 뮌헨의 마리


새벽에 일어나 부엌으로 갈 때면 생각합니다. 한국은 벌써 점심이구나. 오후에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면 한밤이고요.




그리운 샘.


저희 집에는 한국에서 들고 온 시계가 있어요. 검은 빛 바탕에 '복숭아의 꿀'색이라는 유려한 핑크빛 분침과 시침을 가진 시계에요. 원래는 종처럼 그네 타는 소녀도 달려 있답니다. 독일 시간으로 맞추려다 마음을 바꿔서 지금까지 한국 시간 그대로 두었죠. 시계는 복도 끝 책장 위에 놓았어요. 방이나 거실에서 나와 부엌을 들락거릴 때마다, 집을 들고날 때마다 눈이 가장 가는 곳이지요. 새벽에 일어나 부엌으로 갈 때면 생각합니다. 한국은 벌써 점심이구나. 오후에 아이를 데리고 오면 한밤이고요. 어쩌다 수요일 오전에 요가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한국도 아직 밝은 오후겠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마저 들지요.


한국을 생각나게 하는 장치는 묯 가지 더 있습니다. 복도에 가득한 한국 책들이지요. 저는 요즘 더 추워지기 전에 또 다른 프로젝트를 고민 중이에요. 저희 집에서 가장 큰 방이 알리시아 방인데, 그곳을 절반으로 나누어 겨율 내내 볕이 드는 창가 쪽에 제 책들을 옮겨 놓을까 해요. 책꽂이로 방을 가로질러 입구쪽 절반은 아이 침대와 놀이방으로, 창가쪽 절반은 제 독서와 글쓰기 공간으로 쓰려고요. 예전에 책상을 놓아둔 거실은 온종일 해가 들지 않아 춥거든요. 부엌은 알리시아랑 파파가 너무 자주 점령하고요. 다가올 길고 긴 첫겨울을 미리미리 대비해놓지 않으면 행여나 글쓰기가 중단될까 염려되어서요. 중년 우울증이 무섭잖아요.


금요일은 벌써 주말의 시작이라 소음을 내지 않으려 극도로 조심하며 책들을 정리하고 있어요. 벌써 책장 2개는 빼서 알리시아 방 창가로 옮겼구요. 이참에 알리시아 물건도 싹 정리할 생각이에요. 버리는 게 정리라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겠네요. 저녁에 귀가한 클레멘스가 의아하게 바라보면서도 시시콜콜 묻지는 않더군요.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야? 그런 눈빛으로요. 나, 알리시아랑 방을 나눠 쓸 거야. 나도 조용히 책 읽을 공간이 필요하다구. 주말에 다 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올라오진 않아야 할 텐데요.



한국의 시간은 참 빠르기도 했어요. 8년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나 싶네요. 독일에 오니 시간이 참 느리게 가네요. 그래서 글을 씁니다. 제 자신에게 주는 매일의 숙제처럼요. 알리시아가 학교 숙제를 하듯이 말이에요. 독일에 와도 한국의 시간은 여전히 빠르기만 하네요. 여기보다 7시간이나요. 10월이 지나면 다시 8시간이 빨라지겠죠. 눈을 뜨면 한국의 시간은 언제나 길 모퉁이를 돌고 있어요. 어떨 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매정한 연인 같아요.


오늘은 한글학교가 끝나면 알리시아랑 파파만 레겐스부르크에 갑니다. 새 할머니를 만나려고요. 저는 둘이 없을 때 제 겨울방 프로젝트를 완수할 작정이에요. 아직 가을도 깊지 않았는데 참 유난을 떤다 싶다가도 이렇게 제 엄살을 다 받아주실 샘이 계실 때 실컷 부려보려고요. 주사 맞을 때도 미리 아프다 난리 치면 막상 바늘이 꽂힐 땐 훨씬 견딜만하잖아요.

샘의 시간은 어떤가요. 세월이 지날수록 시간의 속도도 빨라진다잖아요. 마음이 바빠져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지요. 초조한 마음보다는 느긋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멀리서 오고 있을 겨울을 맞이하고 싶네요. 한 계절이 이렇게 다가오고 물러가는 것이 고마운 일이 아니면 뭐가 고마울까요. 그리운 사람들의 무소식도 또한 고마운 일이고요.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살다 보면 다시 만날 날도 오겠지요.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저 계절들처럼요. 저는 한국의 시간을 어디에다 올려놓을까 다시 궁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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