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싶어!

해리포터와 함께 한 여름

by 뮌헨의 마리


아이들은 신기하다. 어쩌면 저렇게 단칼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나. 단 한 마디로. 그것도 명쾌하게.




아이들은 신기하다. 어쩌면 저렇게 단칼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나. 단 한 마디로. 그것도 명쾌하게. 며칠 전 저녁에 아이 침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저녁 8시 반이었다. 부지런을 떤 덕분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만 8살인 아이는 아직도 엄마와 함께가 아니면 잠들지 못한다. 아니 잠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태어나서부터 밤마다 책을 읽어주었더니 그게 자장가 역할을 했는지 엄마의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어야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읽어주어야 하는지는 아이에게 달렸다. 충분하다 싶을 때 돌아누우며 하는 말이 신호다. 안아 줘. 그제야 불을 끄고 책장을 덮을 수 있다.


요즘은 3학년이 되어서인지 룰이 느슨해졌다. 아이를 위한 책 읽어주기 프로젝트가 엄마에게서 파파로 넘어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4월부터 시작한 해리포터 일곱 권 읽기는 9월에야 끝났다. 먼저 제안한 건 나였다. 매일 읽어주라는 말은 아니었고,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사흘 동안 파파와 책 읽기 시간을 가졌으면 바랐다. 아이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도. 남편은 일이 많았고, 머리를 식혀야 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에 가뭄에 콩 나듯 혼자 영화를 보고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독일어 해리포터 전권을 올봄에 미리 장만해 둔 것도 잘한 일이었다. 둘은 남편이 퇴근만 하면 800페이지에서 천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해리포터를 들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리포터와 함께 한 봄과 여름이었다.


1년 전쯤 한국에서 해리포터 첫 페이지를 읽어주었을 때 아이가 보인 반응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아이는 서울 독일학교 초등 1학년이었다. 해리가 삼촌집에 살고 있는 첫 장면이었다. 페이지가 넘어갈 무렵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이가 불쑥 한 마디를 했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나는 두 말 없이 책장을 덮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서울 독일학교를 같이 다닌 스마이다 엄마 말이 맞았다. 우리보다 한 살이 많았던 그 집 아이도 엄마 아빠가 독서광이라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주는 가족이었다. 2학년 때 읽어 주니 해리포터에 푹 빠지더라고. 자신 있게 남편에게 권한 것은 믿는 구석이 있때문이었다.



그날 오후는 아이와 마리엔 플라츠의 후겐두벨 책방에 다. 빅투알리엔 마켓을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아이의 배는 늘 그렇듯 갑자기 고파왔고, 수순은 역시 피시 튀김이었다. 튀김옷은 얇고 부드럽고 촉촉했고, 기름기 쫙 뺀 피시는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낼 만큼 먹음직스러웠다. 아이는 내가 딱 한 입 먹은 걸 빼고는 혼자서 해치웠다. 과연 맛있긴 맛있나 보았다. 배가 부르자 아이의 동작이 굼뜨기 시작했다. 피곤해. 집에 가고 싶어. 아, 물론 엄마의 속사정도 비슷했다. 무슨 애 가방이 군인들 행장처럼 무겁나. 그러나 코 앞에 책방을 두고 물러설 수야 없지. 그날 아이는 여름방학 때 읽기를 끝낸 책의 새 시리즈를 한 권 더 살 예정이었다. 아이가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더니 생기를 되찾아 눈을 반짝이며 달려간 곳은 마리엔 플라츠 입구의 여신상 앞. 한쪽 가슴이 황금색이었다.


엄마, 나 저기 손 대고 소원 빌어볼래. 오케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목소리를 낮추며 이번 소원은개란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한 가지는 잘 알고 있다. 보나 마나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겠지. 나도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보았다. 말해 주면 안 돼? 아이가 말했다. 그럼 소원이 안 이루어지잖아. 그럼 말은 왜 꺼냈을까. 아니야 괜찮아, 엄마는 듣고도 금방 까먹잖아. 1초쯤 생각한 후 아이가 말했다. 슬픈 사람이 없게 해 주세요. 엄마는 감동했다. 폰을 꺼내 재빨리 기록한다. 잊어먹기 전에. 아이가 그 동작의 의미를 눈치채고 급 자기 멘트에 메스를 댔다. 아니야, 아픈 사람으로 바꿔! 알았어. 그럼 슬프고 아픈 사람이 없게 해 주세요,로 할게. 다른 하나는 뭘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더니 역시나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였다.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아이가 책 읽어달란 말도 없이 혼자 바빴다. 학교에서 아이패드로 산수 연습을 할 수 있는 사이트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포인트를 얻은 아이에게 3등까지 선물을 준다나. 엄마야 고맙지. 덕분에 노트북을 들고 침대에 앉아 글을 썼다. 얼마 뒤 아이가 내 팔 하나를 들더니 내 품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사랑받고 싶어! 아이에게서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이건 또 뭐지? 안아 줘, 의 업그레이드 버전인가. 요즘 엄마가 입만 열면 언니, 언니 한다며 조카를 질투하더니만. 사실 그날 저녁에도 조카와 다녀올 여행 얘기를 꺼내긴 했다. 당장 핸드폰을 드는 나를 향해 아이가 말했다. 누구한테 써 보내기만 해 봐! 엄마는 벌써 외웠지롱. 엄마 팔을 베고 돌아누운 아이가 잠이 들자마자 발끝을 든 채 숨소리도 안 내고 부엌으로 달려와 당장 썼다. 당분간 아이에겐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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