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무심코 던진 질문에 길게 답이 돌아왔다. 오늘은 누구랑 놀았어? 아무도 안 놀았어. 왜 아무도 안 놀았어? 요즘 파트리치아랑 안 노니? 결론은 요즘 파트리치아랑 잘 안 논다는 것.
"그게 친구야? 같이 놀지도 않는데. 그게 친구야? 아니면 그냥 아는 사이야? 그건 그냥 아는 사이지. 같이 놀지도 않고, 같이 놀겠다는 약속도 안 지키고,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다른 애가 물어봤는데, 파트리치아가 날 안 좋아한대. 그런데 내가 왜 걔를 좋아해야 해?..
내가 쉬는 시간에 기분이 안 좋게 혼자 있으니까 누가 와서 묻는 거야. 너 무슨 일 있어? 그래서 내가 말했지. 파트리치아가 나랑 놀기로 해 놓고 안 놀아준다고. 그랬더니 걔가 그러는 거야. 내가 물어봐줄까? 걔가 널 좋아하는지? 걔가 물어보니까,날 안 좋아한다고 했대.."
친구란 무엇인가. 만 여덟 살짜리의 마음을 이다지도 흔들어 놓는 존재란. 그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말없이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의 눈에 잠시 이슬이 맺혔던 것을 아이는 알까. 아이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하굣길에 아이가 좋아하는 걸로 골라 폰 케이스도 사고, 빅투알리엔 마켓의 도넛 빵집에서 따끈한 독일 도넛 크라번에 설탕도 듬뿍 뿌려서 손에 쥐어주었다. 아이의 기분은 금방 좋아졌다.
내친김에 곧장 동네 미용실에도 들렀다. 예전에 들렀던 오전과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가운데가 벽으로 분리된 두 공간에는 고객들로 꽉 차 있었다. 양쪽 다미용 의자가 세 개씩 있었고, 활기차게 고객을 맞이하는 젊은 미용사들이 고객들 수보다 많아 보였다. 미용실 간판 이름대로 젊은 해적들이 가위를 들고 갑판 위를 바삐 오가는듯한 미용실 홀에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고객의 니즈와는 상관없이 음향 좋은 스피커에서 기세도 좋게 유리스믹스 Eurythmics의 귀에 익은 팝송 Sweet Dreams가 흘러나왔다. 동네 미용실이 아니라 클럽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도 덩달아 신이 나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아이의 머리는 내 머리를 잘라준 파비에게 부탁했다. 언제 봐도 조용한 모습에 나직한 말투였다. 북적대고 술렁이는 미용실 분위기와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잘 어울렸다. 아이도 젊은 오빠 미용사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어땠어? 맘에 들었어? 끝나고 물었더니 수줍어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머리를 감겨줄 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계속해 주었으면 했단다. 엄마가 머리 감겨줄 때와는 완전 딴판이었다나. 애들은 꼭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매를 번다. 코에 피어싱 한 것도 봤어? 하니까 응, 세 개였어, 했다. 파비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적은 금액을 불렀다. 아이 나이를 묻더니 그렇게 부른 것 같았다. 나는 파비가 깜짝 놀랄 만큼 팁을 얹어주었다. 그래 봐야 가격표에 적힌 대로 애초에 파비가 불렀어야 할 금액이었다.
아이는 미용실을 나와서도 자기의 매끄러운 머릿결을 계속해서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의 머리를 잘 빗겨주지 않았던 탓에 아이는 커서도 머리 빗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나 아이나 드라이기로 말리는 게 다였다. 나는 파비가 아이 머리를 감기고 난 후 꼼꼼하게 아이 머리를 오랫동안 빗질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특히 머리칼의 끝부분이 오래 걸렸다. 나 역시 끝부분은 언제나 패스였다. 애가 매번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그 손길 하나만 보고도 안심이 되어서 나는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고 글을 썼다. 마치고 보니 생각보다 길이가 조금 긴 듯했으나 내 머리 때처럼 조금 더 잘라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무척 만족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겨울 지나고 또 오면 되지. 그땐 클림트의 소녀처럼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도록 단발로 싹둑 잘라달라고 해야지.
원대한 꿈이란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말하면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느낀 건데
세상 사람들은 무언가를 찾고 있어요
누군가는 당신을 이용하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당신에게 이용당하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당신을 착취하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착취를 당하고 싶어 하죠
달콤한 꿈들은 이렇게 만들어지죠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자, 머리를 드세요
그리고 머리를 똑바로 하고 걸어요
머리를 똑바로 들고서 걸어 나가요
아이와 나는 노래가 시키는 대로 머리를 똑바로 들고 해적 미용실을 걸어 나와 집으로 갔다. 가는 도중 한 번도 머리의 각도를 바꾸거나 진로를 변경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Sweet Dreams의 가사가 집까지 걸어오는 내내 발밑에서 쿵쿵거리며 키를 잡아주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