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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락 카페로의 초대

E의 가을 초대

by 뮌헨의 마리


한 해 내내 아프느라 내 달란트가 유머라는 것도 잊고 지냈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네. 가을 덕에.


겨울을 예고하듯 뮌헨에 비가 내렸다. 바람도 몹시 불었다. 두껍고 긴 카디건을 껴입고 옷장에서 처음 꺼낸 코트의 목깃을 세우고도 습관처럼 으슬으슬 몸을 떨었다. 언젠가는 찾아올 날이었다. 조금 늦게 왔을 뿐. 마음의 각오를 다지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지난 시간들을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실제로도 그랬다. 어제 요가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상하게도 요 몇 년간 옥토버 페스트 때마다 날씨가 좋다고. 예전에는 안 그랬다고.


이런 날은 아이를 데리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 파파가 예전에 쓰다가 굴러다니던 손바닥만 한 아이폰에 엄마 아빠와 전화가 되도록 연결 준 아이의 폰 케이스도 사야 하고, 등까지 치렁치렁한 아이의 머리를 자르기 위해 동네 미용실에 예약도 해야 하건만 그 모든 일을 내일로 미룬다. 내일은 혹시 해가 날 지도 모르니까. 남편이 출장 가기 전에 켜놓은 거실 난방 장치인 가스 오븐의 불길을 밤새 조금 올려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년이면 100살이 되는 우리가 잠시 빌려 살고 있는 돌집이 차갑게 식지 않도록.

이런 날 내 글에 달린 친구의 정다운 댓글을 읽는 건 기쁜 일. 같이 글 쓰는 입장에서 친구의 아낌없는 칭찬은 쑥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친구가 댓글에 이어 단톡방에도 카페 초대글과 함께 가을 사진을 한 아름 보내왔다. 내가 한국의 가을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20대에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난 이후로 가을은 한 번도 내 가슴을 떠난 적이 없다. 그가 가을을 사랑했던가. 그를 만난 게 가을이었나. 지나간 사정은 일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의 얼굴과 가을을 그리워하는 마음만은 시간이 흘러도 단풍빛으로 남아 알알이 박혀있다.



"빛나는 뮌헨의 가을이었나 보네. 3주나 좋은 볕과 하늘이 계속되다니. 참 멋졌겠어. 오늘 나는 동네 친구들과 아주 멋진 산속 카페에 갔어. 이름은 산자락. 가을이 그대로 쏟아져 들이치는 기분. 아름다운 우리 마을에서도 그토록 강하게 느끼지는 못했는데. 오랜만에 함께 간 친구들을 웃겼어. 한 해 내내 아프느라 내 달란트가 유머라는 것도 잊고 지냈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네. 가을 덕에. 잎이 다 진 모과나무 아래 떨어진 모과를 두 개 주워서 친구들에게 주었어."


카페 이름이 '산자락'이라고 했다. 이름도 참. 저런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나도 이름을 바꿔야 하는데. 아무도 내 이름을 발음하지도, 기억하지도, 불러주지도 않는다. 이곳에서는. 내가 아이의 이름을 하나만 지은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발음하기 쉬운 모음으로. 어려운 받침은 빼고. 단톡 방에서 누군가의 말처럼 이런 곳에서 나를, 우리를 생각해 주는 E의 가을 같은 마음. 하루의 최고 목표가 치료와 휴식이라는 E의 노력이 가을 숲에서 그녀 손에 들어온 잘 익은 두 개의 모과처럼 결실을 맺기를. 그리하여 모과향처럼 요란하진 않으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 글을 다시 쓰게 되기를. 언젠가 저 산에 함께 가게 되기를. 그 자리에서도 그녀의 달란트인 유머가 작렬하기를. 우리의 웃음소리 그 산자락에 멀리멀리 울려퍼지길.


"오늘 넘나 멋진 숲 속 카페 발견. 아주 정갈한 한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과 차 마실 수 있는 카페 두 개의 공간이 있는 곳. 너무 아름다운 걸 보니 자유 해지는 나를 느끼게 됐어. 언니들 생각 짱 났어. 다 같이 오고 싶은 곳. 카페 안보다 바깥이 숲 속이라 더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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