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리가다, 오브리가도

리스본의 마지막 날

by 뮌헨의 마리


그 어떤 언어보다 품격 있게 들리던 감사의 말. 품격이 밥 먹여 주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때로는 밥을 먹여준다. 영혼의 밥 말이다.



리스본의 마지막 날은 형네가 새벽에 출발하는 바람에 단출했다. 아침을 먹기 전에 여행 가방부터 싸느라 식사에 늦었다. 남편과 아이를 미리 보내길 잘했다. 내가 믿는 건 바바라. 한국 사람 눈으로 보면 진짜 동작이 느린 바바라가 설마 나보다 먼저 가 있는 건 아니겠지? 새어머니는 불면증이 있으시고, 꼭두새벽에 일어나시는 편이라 휴가 때마다 식사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당연하지. 새벽 5시면 우리에겐 한밤중 아닌가.


먼저 떠난 형과 형수는 휴가 때마다 일찌감치 선언을 한다. 자고로 휴가란 밀린 잠을 실컷 자고 볼 일. 한껏 게으름을 부려도 되는 시간. 그러니 아침은 9시 반. 나 역시 북독일에서 오신 이분들의 노선에 100% 동의한다. 그러나 어쩌랴. 바바라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노선대로 가는 스타일. 일행 중 언제나 제일 꼴찌로 나타나고. 우리까지 보이콧하면 새어머니가 혼자 식사를 하셔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온 가족이 왔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아침 8시 반으로 절충한다.

그런 바바라가 마지막 날 아침 나를 배신했다. 부랴부랴 내려가니 새어머니가 매일 아침 잡아두시는 가족 테이블에 딱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둘이 빵과 커피를 가지러 가며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렇게 일찍 오면 어떡해? 너만 믿었는데! 바바라가 고소하다는 듯 혀를 쏙 내밀었다. 진심으로 말하는데, 지난 20년 가까이 열댓 번도 넘는 가족 여행 중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렇게 동작이 빨라지면 곤란한데. 그럼 내가 눈치를 받느냐고? 그렇진 않다. 내가 아침잠이 유독 많다는 건 일찌감치 파악하셨기에.



전날 하도 날이 좋아서 일찍 서둔 것이란 걸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바바라는 해를 좋아한다. 일명 바바라기.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는 않았겠지. 트람 28번을 타고 마지막 날 오른 곳은 리스본 성. 물론 트람이 성까지 가는 건 아니고 중간에 내려서 걸어야 한다. 차표를 구하고 지도 보고 길 찾기는 움직이는 네비인 남편의 몫이다. 날씨는 푸근하고 정오까지 시간이 넉넉한데도 바바라와 내가 자꾸만 뛰어야 했던 이유는 동작이 빠른 새어머니와 남편 때문. 우리는 찍을 사진도 많고 발길을 멈추고 찬찬히 보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하루 전날 사라마구 재단에서 500미터 떨어진 파두 뮤지엄을 새어머니와 바바라와 같이 갔을 때도 그랬다. 사라마구 재단은 그 이후에 나 혼자 둘러보기로 하고. 파두 공연을 못 봤기에 뮤지엄에서 노래도 좀 들어보고 싶었건만 무정하신 새어머니는 어찌나 빠르신지! 한 바퀴 휭 둘러본 후 출구로 나가시는 바람에 바바라와 나는 사진만 열심히 찍다가 따라 나왔다. 그나마 동작이 한 수 빠른 내가 기념품 숍에서 마그네틱을 건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 바바라도 하나 사주고 싶었건만 눈짓으로 물어보니 뭘 살 지 고민하느라 결국 못 샀다.


공항에서는 남편과 새어머니를 일찌감치 라운지로 보내고 바바라와 아이와 기념품도 사고 즐겁게 구경했다. 여행을 썩 즐기는 편이 아닌 나도 이번 가족 여행은 예전보다 편안했다. 잠깐 스쳐 지난 포르투갈 사람들 덕분에. 포르투갈 언어도 한몫했는데 내가 들은 말은 주로 그곳 남자들의 감사의 말이었다. 오브리가도 Obrigado. 여성형은 오브리가다 Obrigada. 놀라워라! 감사함에도 남성형과 여성형이 있다니. 그 어떤 언어보다 품격 있게 들리던 그들의 말. 품격이 밥 먹여 주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때로는 밥을 먹여준다. 영혼의 밥 말이다.



배경은 전날의 테주 강. 강인 줄도 모르고 만인가 바다인가 고개를 갸웃했던 곳. 남편에게 물으니 바다 아닌가 하길래 그런가 했다가 나중에 지도를 보고서야 강인 줄 알고 만이라고 썼던 글을 고쳤다. 하얀 요트들이 떠 있고 아름다운 다리가 실루엣처럼 받쳐주던 곳. 해바라기를 하며 온 가족이 강 앞에 앉아 있는데 내 옆에 앉아 있던 포르투갈 커플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이렇게도 찍어주고 저렇게도 찍어주고 가로로도 세로로도 찍어주었다. 여자에게 폰을 돌려주는데 남자가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브리가도, 오브리가도.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언어에 반하는 순간이었다.


다음은 마지막 날 성 앞. 워킹 가이드라는 명찰을 단 중년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성 가이드가 필요하면 자기에게 부탁하라고. 큰 키에 브리티시 영어 악센트가 듣기 좋은 가이드였다. 시간이 많지 않고, 그가 부른 단가가 너무 세서 가족들이 고개를 젓는 바람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Sorry, maybe next time. 미안하다고 한 마디 덧붙여서. 그가 한 걸음 물러서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브리가도. 햄릿의 목소리로 햄릿처럼 절도 있고 품위 있게. 그래서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그 말, 오브리가도. 오브리가다는 언젠가 다시 가서 비교해 보기로 하고 아름다웠던 이 도시에 고맙단 말부터 전해야겠다. 오브리가다, 리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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