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리스본의 28번 트람

by 뮌헨의 마리


사진에 다 담을 수도 없었던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찰나였고, 순식간에 우리를 스쳐 지났다.


다시 28번 트람을 탔다. 전날보다 1시간 일찍 서두른 탓인지 오래 기다리지 않고 승차할 수 있었다. 땅콩 트람이라고 불러야 할까. 꼬마 비엔나 소시지 만한 크기의 한 칸짜리 트람이었다. 좁고 굽은 리스본의 골목을 다니기에 꼭 맞는 사이즈. 종점까지는 숱한 골목길을 돌고 돌아야 했다. 때로는 오르막이 때로는 내리막이 그리고 가끔 평탄한 곳도 지났다. 건물과 사람을 스치기라도 할 듯 아슬아슬한 골목들 사이로 탁 트인 길이 나타날 때도 있었다.


오, 리스본의 트람 28번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햇살은 맑고 바람은 조금 쌀쌀했다. 공원의 은행나무에는 빽빽한 황금빛 잎들. 초록과 노랑과 빨강 잎들을 조화롭게 매단 가로수들도 부지기수였다. 우리 인생길 역시 저렇지 않은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그 사이에 잠시 주어지는 평온한 순간들. 꽃처럼 피어나던 날들에서 잿빛으로 추락하던 시간들까지. 리스본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사진에 다 담을 수도 없었던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찰나였고, 순식간에 우리를 스쳐 지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찬란했던 제국. 그것도 아득히 먼 옛날인 1500년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빛바랜 영광. 페인트가 벗겨진 건물의 외벽. 폐허의 흔적. 우중충하게 사위어 가는 빛. 세월의 흐름을 정직하게 간직한 타일들. 내가 상상한 리스본은 그래야 했다. 그리고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도시에도 품격이 있다면 내겐 리스본이 그랬다.



단순한 전통만이 아닌 어떤 것들. 눈길을 붙드는 오래된 건물들의 우아함. 온갖 문양의 창틀과 발코니의 유려함. 견고한 초록의 문과 그 위에 적힌 숫자들의 당당함. 햇살을 받고 빛나는 격조 있는 타일들.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수하기만 한 것도 아닌 세련된 색채감. 요트가 정박한 부둣가의 빛바랜 청회색과 여행자의 눈길과 발길을 단순에 사로잡는 핑크빛.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조화로웠다. 창 밖에 걸린 빨랫대에서 자연스럽게 펄럭이던 빨래들까지.


내가 놀란 건 홈리스나 구걸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 거리가 청결하다는 것. 1월의 날씨가 영상 15도라는 것. 바다나 호수처럼 잔잔한 테주 강 Rio Tejo의 바람도 매섭지 않았다는 것. 그날 뮌헨에서는 쌓인 눈 속으로 썰매를 타러 나간다는 소식이 실시간으로 들려왔는데. 첫날 문어를 시켰더니 오븐에서 통째로 구워져 나오던 것도. 모던하고 핫한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던 남자들의 인상이 한결 같이 무척이나 순하더라는 것도.


아, 주제 사라마구 재단에도 들렀다. 그의 서적과 사진들과 노벨상 수상 관련 자료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곳이었다. 따로 기념품을 판매하지는 않았다. 사라마구 재단에서 500미터가량 떨어진 파두 뮤지엄에도 들렀다. 파두 뮤지엄의 기념품 숍에서 다시 페소아를 만난 건 놀라움 그 자체였고. 그는 어디에나 있었고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하루 종일 해가 따라다녀 여행 마지막 날을 장식한 것 역시 기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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