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출근은 어땠는지도 궁금했다. 지미는 약간 쑥스러워했고, 환하게 웃었고, 첫 출근은 괜찮았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율리아나의 아빠 지미는 태국 사람이다. 올해 나이는 만 39세. 마른 체구라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 표정과 태도가 부드럽고 평온하며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기타를 치고 테크노를 즐겨 듣던 그의 얼굴과 몸에 전에 없던 활력이 넘치기 시작한 건 최근이었다. 지난 금요일 지미는 첫 출근을 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다른 쪽으로 직장을 구했는데 태국 대사관이었다. 율리아나 할머니께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나 역시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율리아나 할머니의 푸념을 들었던 뒤라서 더더욱 놀라웠다. 할머니와 함께 아이들을 픽업하고 하교하던 길이었다. 지난가을부터 취업 준비로 바쁘던 지미의 근황에 대해 내가 여쭈자 할머니는 긴 한숨과 함께 누구나 짐작할 만한 장모님의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일을 안 시작했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독일 온 지 벌써 10년이야, 10년! 할머니가 두 번이나 강조하신 그 10년이 무슨 뜻인지 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계획대로라면 그때는 지미가 실습을 끝내고 새해가 밝아오기 전에 일을 시작했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아시아 남자와 결혼하고 자식 둘에 네 식구의 가장으로 살고 있는 딸을 보는 엄마의 마음에 국적이 있겠는가. 할머니는 가까운 곳에 따로 사셨다. 내 결론은 할머니의 딸 이사벨라가 대인인 거다. 그래도 지미가 젊으니까 이사벨라보다는 오래 일할 수 있잖아요. 할머니를 위로하느라 한 마디 거들었는데 위로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세상에, 너무 잘 됐네요. 얼마나 기쁘세요! 치하를 드리자 대뜸 이러신다. 글쎄, 계속 지켜봐야지. 오늘이 첫날인데 뭐. 이런 쿨하신 양반이 있나.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이 어떤 날인가. 학교 방과 후도 없고, 급식도 없고, 숙제도 없다. 아이들에겐 신나는 주말의 시작일 뿐. 미리 이사벨라와 말을 못 맞춘 건 내 실수였다. 오후 1시 반에 내가 아이들을 픽업해서 우리 집에서 놀게 하겠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할머니는 요지부동이셨다. 딸에게 들은 바가 없으니 할머니 집으로 율리아나와 남동생 둘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우기셨다. 오후 5시에 딸이 퇴근하며 아이들을 데리러 올 때까지. 그때 딸에게 물어보겠다시며. 한겨울 뮌헨의 오후 다섯 시는 벌써 저녁인데.
아이들은 낙담해서 각자 보호자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고개는 숙이고 기운은 빠진 채 울고 싶은 얼굴로. 할머니는 우리 마음을 진짜 몰라!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아이가 쫑알거렸다. 할머니가 거기까지 헤아리실 여유가 없다는 걸 나는 안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어른들의 속사정까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오후 다섯 시에 이사벨라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엄마도 참! 진작 알았으면 너희 집으로 보내라 했을 텐데. 지금이라도 보낼까? 아이에게 묻자 기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벌써 3시간이나 기다리고 있었다구!!!
세 시간의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난 아이들은 세 시간 동안 즐겁게 놀았다. 밤을 새워 놀아도 모자랄 것 같은 기세로. 8시 직전에 지미가 율리아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첫 출근 아닌가. 힘들게 5층까지는 올라오지 말고 1층에서 기다리라 말하고 아이들과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꼭 말해주고 싶었다. 축하한다고. 첫날의 직장은 어땠는지도 궁금했다. 지미는 약간 쑥스러워했고, 환하게 웃었고, 첫 출근은 괜찮았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지미의 순하고 선하던 낯빛이라니.
지미가 어떻게 대사관에 취업을 했는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주말에 내린 눈은 쌓여 있지, 날씨는 화창하지, 아이들이 방과 후에 잔디 공원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한 건 당연했다. 마침 이사벨라의 전화도 받았겠다, 급히 아이의 스키 바지를 챙겨 들고 잔디 공원으로 달려갔다. 이사벨라의 집은 공원 앞이었다. 해가 지자 아이들을 눈 쌓인 이사벨라 아파트 건물 안쪽 뜰에다 몰아넣고 이사벨라의 집으로 올라갔다. 그 집 안방에서는 뜰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율리아나 할머니께서 딸네에 준다고 장바구니를 들고 들르셨다. 아직 지미는 퇴근 전이었다.
이사벨라가 끓여준 뜨거운 차를 두 손으로 마시고 있는데 모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할머니가 헝가리어로 물으시면 딸이 독일어로 대답하는 신기한 구조였다. 버스 운전과 트람 운전 중 어느 것이 나은가, 등등 주로 운전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하! 지미가 실습 중이던 건 운전이었구나! 몰랐다. 그럼 대사관에서는 뭘 하지? 더욱 궁금해졌다. 할머니가 가시고, 지미가 왔다. 검은 빵 한 덩이를 사들고, 가장의 향기를 풍기며. 아이들도 올라와 빵으로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노타이에 하얀 와이셔츠, 검은 코트를 걸친 지미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타이는 푸른색으로 착용하라는 대사관 쪽의 말을 아내에게 전하는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날은 출근 사흘째였다. 일은 어땠어? 이사벨라의 질문에 딱 한 번 밖에 안 했단다. 궁금해서 직접 물어봤다. 지미, 대사관에서 무슨 일을 하니? 운전? 그렇단다. 대사관 쟙은 어떻게 구했어? 페이스북으로 우연히 봤다고. 조건은 단 하나. 독일 운전 면허증을 소지하고 있을 것. 본인 말대로 이렇게 운 좋은 사나이가 있나. 지미는 독일에서 운전을 했다. 이것은 이사벨라의 승리. 단연코 그의 아내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