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정체는 외계인. 좀비는 아니고, 지구 탈출에 한몫을 할 착한 에어리언 Alien. 커피도 좋아하는.
어젯밤의 일이다. 살면 살수록 같이 사는 사람의 정체가 모호해진다는 것은 결혼 생활이 안겨준 퀴즈다. 점점 어려워지는 수도쿠 같은 것. 이 퀴즈를 풀지 못하는 한 열차에서 내릴 방법은 없다. 정거장도 없고 출구도 없다. 함정은 답을 아는 사람도, 답도 없을 때. 그럼 방법은? 가장 쉬운 방법은 창문을 열고 숨통을 틔우기. 조금 대담한 방법은 영화에서 숙련된 조교들이 보여주듯 열차가 커브를 돌 때 가볍게 그러나 목숨은 걸고 뛰어내리기. 가장 어렵고도 용기가 필요한 것은 수동으로 열차 세우기. 이 경우 심신이 피폐해지고, 후유증이 오래간다는 어려움이 있다.
어제 아침 7시 15분. 남편은 행군하는 군인들의 백팩만큼이나 무거운 가방을 메고 출근을 했다. 튼튼한 노트북이 두 개나 들었다. 8시 13분.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출근 1시간 만에 울리는 전화에는 이유가 있는 법. 열쇠를 안 가져갔단다. 보통은 폰을 안 들고 가서 다시 오는데. 그러면 전화가 아니라 초인종이 울려야겠지. 열쇠 홀더에는 집 열쇠뿐만 아니라 사무실 열쇠도 세트로 달려 있다. 예상을 깨고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부엌 테이블 위에 판을 펼치기 시작. 노트북 두 대를 나란히 놓자 테이블 절반이 사라졌다. 곧 화상 미팅이 있단다.
나 역시 바쁜 때였다. 조카를 포함 가족 셋의 아침을 준비하고 차례로 내보내는 데에도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겨우 글쓰기의 재료가 될 책을 옆에 펼치고 몇 자 적기 시작한 때였다. 남편의 다중 화상 통화가 시작되자 글쓰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복도로 갔다. 아이의 새 책상에 앉았다. 왜 바쁠 땐 바쁜 일만 계속 일어나는지. 톡까지 거들었다. 서둘러 답하고 글쓰기를 계속했다. 그 글은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로에서 몇 자 수정하다가 통째로 날렸다. 사진만 남기고. 벌써 세 번째 사고였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어젯밤 남편은 늦게 귀가했다. 저녁 8시 40분이 되어서야 일이 끝나고 오는 중이라는 톡을 받았다. 다음날 먹을 빵이 없어서 남편에게 빵을 사 오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런 경우 남편은 기대에 어긋나는 법이 없다. 내일의 식량은 준비된 셈. 안심하고 자도 되겠다. 남편은 오자마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며칠 동안 자정 넘게 일을 하고 일찍 일어나느라 피곤했기 때문이다. 10시쯤에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잠을 자러 가면 안심이 된다. 가장의 건강은 소중하니까. 조카도 저녁 일을 빼고 일찍 돌아왔고, 아이도 침대에 보냈으니 낮에 날려먹은 글만 완성하면 되겠다.
밤 11시 30분. 글은 완성해 올렸고, 마음은 편안했다. 남편이 자다가 부엌에 들러 가스 물을 들이켰다. 빈 속에 가스 물은 별로던데. 사실이었다. 방에 가니 남편은 자꾸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했다. 창문 하나도 윗부분을 열어둔 채였다. 에고, 추워라. 나는 이불속으로파고들고 남편은 잠이 오지 않는 눈치였다. 어둠 속에 남편이 일어나 앉더니 자기 프로젝트에 대해 들어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도울 방법이 그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남편도 안다. 내가 자신의 일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이해 불가인 것이다.
남편은 AI 관련 1인 사업체를 한다. 신기한 건 아무리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 데이터 응용 프로그램? 대충 감을 잡자면 그랬다. 남편의 설명은 길었다. 잠은 언제 자나. 1인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옆에 누웠던 남편이 갑자기 유레카를 외치며 일어났다. 굿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것.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린 걸까. 자기 말을 끝까지 들어주어 고맙다며 활기차게 부엌으로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부엌에 가보니 A4 용지에 세 장이나 써놓은 메모들이 보였다. 10년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살아 보니 남편의 정체는 외계인. 좀비는 아니고, 지구 탈출에 한몫할 착한 에어리언 Alien. 커피도 좋아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