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끝이 있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어제는 흐렸던 슈탄베르크 호수가 오늘 아침 맑고 푸르게 갠 것처럼.
이게 전날의 그 호수란 말인가!!! 다음날 아침 슈탄베르크 역의 호수 전경.
시부모님께 이런 일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잘한 게 있다면 금요일에 휴무를 신청해 놓은 것. 사실은 지역 킨더 벼룩시장에 참가할 생각이었다. 벼룩시장이 열리는 장소가우리 집 근처라 이동하기도 쉽고 신청 조건도 까다롭지 않아 참가 신청을했다가 어제취소 메일을 보냈다. 금요일 아침에는남편의대장 내시경 예약도있어서 남편의 병원에도동행할 생각이다.집안에 갑자기 환자가 셋이나 생기다니! 내가 휴무안 받았으면 어쩔 뻔했나.
시어머니는 원래토요일에 병원차로 재활원까지 가실 계획이었다. 그런데 담당 의사가 SUV 차량이라면 가족과 움직여도 된다고 허락한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차가 바로 그 차였다. 시아버지가 편하게 타실 수 있게 바꾼 지 몇 년도 지나지 않은 차였다.운전이라면 남편이 제격이었다. 북독일에사는 남편의 형은 내려올 가능성이적고, 시누이 바바라는 운전 경력이 짧고,시아버지의 장녀는 산부인과를 개업하고 아이도 어려서 늘 피곤하다. 내가 붙여준 남편의 별명은 차와 일심동체, 소위 움직이는 네비였다.
토요일한글학교는빼먹기로 했다. 그러면내 생활을 너무 희생하는 거 아니냐고? 글쎄. 좋아서 하는 것도 희생이라고 쳐준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그러나지금까지나는 희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도움이 절실한시부모님을위해 시간을 나누는 걸그렇게말하면 곤란해진다.나도 나름 생각이 있다. 이참에 며느리노릇을좀해볼까 한다. 결혼 1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끝이 있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어제 흐렸던 슈탄베르크 호수가 오늘 아침 맑고 푸르게 갠 것처럼.
수요일엔아이가 선언했다. 방과 후에하루를쉬겠다고. 할머니 할아버지 방문도 쉬고. 그럴 만도 하다. 월요일 오후엔 할아버지를, 화요일 오후에는 할머니를 방문했으니. 알바를 마치고 잠깐 시어머니 병실에 들렀다.시아버지 상태도 알려드리고 시어머니의 형편도 살피기 위해서였다. 시어머니는 용감하셨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침대에 앉고 보조기를 잡고 일어서고 화장실까지 무사히 다녀오고 다시침대에눕는일련의 과정을훌륭하게 해내셨다. 그것도 혼자서. 저런 내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같다. 시무룩하거나 지쳐있거나 우울한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들다. 시골 마을의 처녀처럼 생기 가득하시다. 잘 웃고 쿨하시다. 시아버지가 쓰러지셨어도 본인에게 예정된 고관절 수술을 진행하셨다. 언젠가는 올 일이 닥쳤다고 생각하신다. 수술을 미룬다고 나아질 것도 없고, 시어머니의 인생도 있는 법이니까. 3주간 자식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시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의 풍광 좋은 재활원에서 같이 지내시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삶이 끝장난 것은 아니다.
그날 오후의 병실에는 나밖에 없었다. 시어머니가 물으셨다. '매일 차비는 얼마나 드냐?' 뮌헨에서 슈탄베르크까지1 day ticket가격이 8.90유로였다. 시어머니가 잠시 생각하시더니 내 차비와 바바라 차 기름값을 챙겨주시겠단다. 우리 시어머니는 이런 분이다. 괜찮다고 해도 그러는 게 아니란다. '가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차비는 받아야지.' 시부모님 병문안 가서 차비 얻어오는 며느리는 드물지 않나? 그날 저녁 남편과 나와 시어머니의 3인 공동 왓츠앱에시어머니가날리신 멘트가떴다.'혼자 걷기에 성공하심! 할머니멋지지 않니, 알리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