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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un 28. 2019

나도 괜찮은 주부가 될 수 있을까

멀고도 요원한 주부의 길


나는 탈락하지 않고 피니쉬 라인을 무사히 밟을 수 있을까. 낙제점을 겨우 면한 주부의 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그 길을.


오늘은 새벽같이 남편이 이웃 동네 스위스로 출장을 갔다. 와이프로서 기본은 해야겠기에 남편보다 30분 일찍 알람을 맞춰 일어났다. 보통은 남편과 함께 일어나 남편이 씻고 준비하는 10분 동안 신공을 발휘해서 세 가지를 완성한다. 물 한 잔에 레몬 반 개를 한 손으로 기. 요구르트에 과일 넣고 견과류 올리기. 빵을 잘라 버터와 햄과 살라미와 루꼴라나 토마토 혹은 오이 피클을 끼워 남편이 좋아하는 머스터드소스를 한 줄로 길게  세워 샌드위치 완성하기. 


오늘은 남편이 무더운 날씨에 먼 길을 다녀와야 해서 평소보다 성의를 보이려는 심사도 깔려있었다. 안 하던 짓을 할 때 상대에게 어필하는 법이니까. 이번 주 뮌헨의 날씨는 정점을 찍었다. 화요일도 무지막지 더웠고, 수요일은 최고 기온이 34도를 찍었으니까. 그것도 바람 한 점 없이. 목요일인 어제는 가게에 평소보다 점심 손님이 줄 정도로 폭염이 계속되었다. 오죽하면 수요일 밤엔 열대야까지 경험했다.  역시 일사병 직전까지 갔다. 이번 주 내내 머리가 기분 나쁘게 묵직했던 게 그 증거다.


이런 날씨에 러닝 위에 셔츠까지 입어야 하는 남자들은 얼마나 더울까. 남편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 나는 오늘 민소매로 출근할 생각인데. 하루 종일 불 앞을 지켜야 하는 셰프들은 더하겠지? 우리 가게만 해도 무지 덥다. 당연하지. 불 안 가리고 불 앞을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좀처럼 땀을 흘리지 않는 나 역시 얼굴에 땀이 비 오듯까지는 아니고 송골송골. 알바를 갈 때마다 사우나를 간다생각한다. 피부에도 좋겠지. 찜질방을 거의 안 가는데 매일 돈까지 받으며 사우나를 가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갑자기 화장도 잘 받고 피부도 촉촉해지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이란!



아참 그래서 남편분은 잘 가셨냐고? 남편이 다정한 웃음을 띠며 무거운 백팩을 메고(저게 출근 가방이다!) 시연용 장비를 들고 문을 닫고 나간 후 부엌 테이블 도마 위에 덩그러니 놓인 샌드위치 발견. 남편분 코 앞에 두었는데 그걸 못 보시나. 하긴 얌전히 종이로 싸 둬서 그럴 수도 있겠다. 머릿속이 오로지 일 하나로 가득  눈은 단지 방향 감지용일 뿐. 애나 남편이나 손에 쥐어주지 않으면 모르긴 매한가지.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재빨리 샌드위치를 고, 복도 계단 아래를 향해 남편을 소리쳐 부르며 뛰어내려 갔다. 그것도 맨발로! 남편도 틀림없이 봤겠지? 나의 맨발의 투혼. 


모처럼 괜찮은 주부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것 같아 뿌듯해졌다. 등교하는 아이와 함께 카페로 출근했다. 카페에서 글도 쓰고 알바 가기 전에 양아버지 양말도 사야 한다. 어제 시어머니께서 부탁하신 미션인데 나는 이런 부탁받는 걸 은근 좋아한다. 취향도 참! 몸 상태가 자마자 시어머니에게 왓쯔앱을 보냈다. '저 많이 나았어요! 금요일 갈게요! 뮌헨의 세 아가씨들로부터.' 왜 나는 몸이 아픈데 시부모님 생각부터 나나. 나 못 보셔서 어떡하시나. 이런 착각은 빠른 회복에 지대한 도움이 된다. 이 정도면 병 아닌가. 일명 시댁 홀릭!


오랜만에 익숙한 카페에서 오래 알고 지내던 덩치 큰 가이드와 인사도 나누고, 카푸치노 한 잔에 크림이 듬뿍 든 크루아상을 먹는 즐거움. 그새 바리스타는 팔에 문신 가득한 뉴페이스로 바뀌고.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저항하지 않는다. 변화도 좋다. 새 바리스타가 이태리 식대로 카푸치노와 함께 바 위에 올려주는 물 한 잔도 기분 좋게 받아마셨다. 물론 돈 받고 파는 생수는 아니고 그냥 수돗물. 독일에선 다들 수돗물도 그냥 마신다. 그나저나 멀고도 요원한 주부의 길. 나는 탈락하지 않고 피니쉬 라인을 무사히 밟을 수 있을까. 낙제점을 겨우 면한 주부의 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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