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타이밍이다. 시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은 시간. 당신들을 위해 낼 수 있는. 마침 내겐 시간이 넘쳤고 그것이 그분들의 니즈와 딱 맞아떨어졌다.
수요일 밤 9시.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출장을 갔다가 자정이 넘어야 돌아오는 날이었다.정상적이라면 아이는 침대속에 있어야 할 시간. 그 시간에 전화를 하실 정도면 무슨 일이 있으신 거다. 아이는 자냐, 물으셔서 곧요, 이실직고했더니 어머니가 웃으셨다.'내일알리시아는 몇 시에 데리러 가니?'시어머니의 의중을 심사숙고하기도 전에 아이가옆에서 냉큼 '할머니, 4시요!' 하고 대답했다.
'아!그럼, 됐다..'시어머니의 목소리에실망이 느껴졌다. 아하, 우리가 오길 바라시는구나. '내일 저희가 갈까요? 알리시아는 언제라도 데리러가도되거든요.' 사실은 이부탁을 하시려고 전화를거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용건 없이 전화하지는않으시겠지. 그것도 밤 9시에. 나는 또 그것이고마운 것이다.급할 때 나를 찾으셨다는것이. 당신딸도 아들도 아닌 한국 며느리인 나를.
전생에 나는 무수리였나보다.그렇지 않다면 시부모님의부탁시 이리반가울 리가 있나. 사랑도 타이밍이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은 시간. 당신들을 위해 낼 수 있는. 마침 내겐 시간이 넘쳤고그것이 그분들의 니즈와 딱 맞아떨어졌다. 한국이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만큼 바쁜 세상을나는 알지 못한다. 정신이 없었다는 것만 빼면,즐겁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맞았다. 어머니가 물으셨다. '내일 오후에 너희가 와 주면 좋겠구나.'
시어머니는 목요일 오후에 고관절 수술 경과를 체크하기 위해 뮌헨의 병원을 방문하셔야 했다. 나 역시 알고 있는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저녁 시간까지 혼자 계실 시아버지 걱정을 안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번 주에는 미국에서 시아버지의 작은 딸이 어린 손주와 와 있기 때문. 멀리서자기 아버지 병환 소식에 애태웠을 딸이 얼마나 잘 모시겠나 싶어서. 그런데 다섯 살 손주가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두 분의혼을 다 빼놓은 눈치였다. 시아버지를 염려하는 딸의 잔소리또한만만치는 않았던 모양.
그날은 시아버지딸이 아들을 데리고 뮌헨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저녁 9시가 넘어야 돌아온다고 했다. 옳거니, 두 분이 기대한 건 나와 우리 아이. 아이가 할아버지와 TV보며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라시는 것.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 늦은 시간까지 고민을 하셨담. 다음날 아이를 데리고 오후 3시 기차를 탔다. 할머니가 일러주신 대로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신나게 아이스크림을 세 스쿱이나 떠서 먹었고, 나는 커피를 마신후 지난 번 약속대로 시아버지의 발톱을깨끗하게깎아드렸다.그리고 정원으로 직행!
아이가 할아버지 옆에 있으니 안심하고 앞 정원과 본 정원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햇살은 따끔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떨어지기 직전인 장미꽃을 자르고 어린 봉우리들만 남기니여인의 손질한 머리처럼 산뜻했다. 저장미의 위엄을보라! 바께쓰안에서도 품위를 잃는 법이 없구나. 한 번뿐인 인생, 저렇게 살다 가야 하는데. 시어머니의 정원에는 새들의 소리, 연못으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 갈색으로 뒹구는 나뭇잎들의 바스락소리, 여린 초록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위아래로천을 짜듯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고요하고도소란했으나거슬리는 법이없는오후의 정원.
이후의 일정은 초스피드로 진행. 저녁 7시 시어머니 귀가. 저녁 8시 시어머니의 모차렐라 토마토 샐러드는 꿀맛이었다. 저녁 9시에 에스반을 타고 뮌헨으로 돌아왔다. 슈탄베르크 역에서 바라본 호수는 핑크와 하늘빛으로 물들어 가고. 뮌헨 중앙역에서 기다리던 남편과 만나 집에 돌아오니 10시. 피곤해 죽겠다고 침대 위로 쓰러진아이는 얼마 전에 시작한 <오만과 편견>의 챕터 하나를 읽어 주고서야 잠이 들었다.나이가 들수록 오만과 편견이 한 겹씩 벗겨지는 날들이 되어야 할 텐데. 매번차비를 쥐어주시는 시어머니의 마음도 기억해야지.
목요일 저녁 9시. 뮌헨으로 돌아올 때 슈탄베르크 역에서 바라본 슈탄베르크제 Stanbergsee 호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