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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Oct 04. 2019

시어머니 정원에 빛나던 시들

자크 프레베르, 릴케 그리고 강형철


그날 시어머니의 정원에서 내 시선을 끈 것은 해질 무렵 황금빛으로 빛나던 나뭇잎들. 그 위에서 햇살과 뒹굴던 늦여름 시들. 가을과 겨울을 함께 지낼 시들이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어머니의 정원. 저들이 시가 아니면 뭔가.



브런치에서 <날마축제 뉴요커 일기>라는 매거진을 읽다가 어제 뉴욕의 시월 기온이 30도를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뮌헨은 어제부터 얼마나 쌀쌀하던지 아침 일곱 시  출근길 기온이 6도였다. 낮 최고 기온이 겨우 12도. 옥토버 페스트가 끝나는 이번 주말에는 비 소식까지 있어 앞으로도 따뜻한 날을 기대하기는 어렵겠다. 그 매거진에서 황동규의 시월과 릴케의 가을날 시를 읽었다. 가을에 빛나는 시들.


어제 독일은 공휴일이었다. 독일 통일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동안 아이는 독일 할머니와 둘이서 옥토버 페스트에도 다녀오고, 지난 주말에는 할머니와 바바라 고모와 셋이서 어린이용 오페라도 보고 왔다. 할머니는 자주 뵀는데 할아버지가 많이 기다리실 것 같았다. 주말에 전화를 드리자 언제 오냐? 내일? 모레? 하고 물으셨다. 어제 오후 일을 마치고 아이와 시어머니 댁에 다녀왔다. 아이는 매주 시험을 보느라, 나는 매일 일하느라 피곤했지만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모습에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어머니 정원에 피어 있던 마지막 장미열두 송이나 선물로 주셨다. 어머니의 식탁 위에도 향과  강렬한 마지막 아메리칸 뷰티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다이닝 룸으로 비쳐 드는 늦은 석양빛에 빛나던 장미 앞에서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선을  것은 해질 무렵 어머니의 정원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던 나뭇잎들.  위에서 햇살과 뒹굴던 늦여름 시들. 나의 가을과 겨울을 함께 지낼 다음과 같은 시들이었다.



어머니 식탁을 장식한 아메리칸 뷰티와 선물로 받은 장미들(위) 어머니 정원의 마지막 꽃들(아래)


알리칸테 Alicante

by 자크 프레베르


탁자 위에 오렌지 한 개

양탄자 위에 너의 옷

내 침대 속에 너

지금의 감미로운 선물

밤의 신선함

내 삶의 따뜻함




가을날

by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들판의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이게 해 주소서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길을 이리저리 소요할 것입니다




사랑을 위한 각서 12

by 강형철


나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 말했던가

칸나꽃 붉게 폈던 여름이었나

그대 왼손을 들어 헝클어진 머리칼 올려

땀을 닦던 유리창 곁이었나


나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 말했던가

세월은 흘러 너와 나의 얼굴엔

시간이 숨 쉬고 간 그늘만 아득하고

그때 서로에게 기댄 이야기가 가늘고 긴

주름으로 기울었는데


나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 말했던가

우부룩한 잡풀 더미 속

칸나꽃 붉게 피어 우르르 밀려와

저기서 문득 멎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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