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눈물이다

호텔 8

by 뮌헨의 마리


'괜찮아, 마리. 니 마음 이해해. 그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해. 절대로 마음에 담아두면 안 돼. 너 자신을 위해서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불운한 토요일이었다. 내 직업을 찬양하던 전날과는 정반대의 기분이었다. 당장 글을 내리고 일을 때려치우고 싶던 날.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16일 동안의 옥토버 페스트에는 세 번의 주말이 있다. 그중 가장 바쁘다는 두 번째 주말은 우리 호텔에도 손님이 차고 넘쳤다. 그날은 아침 출근부터 지각을 면하느라 정신없이 걸었다. 요즘 내 출근 시간은 평일 7시, 주말 7시 30분. 주말에는 조식 시간이 8시부터인데 7시 반부터 두 그룹의 이태리 손님들이 몰려와 소란한 아침이었다.


주방에서 같이 일하는 미나 역시 정신없어 보였다. 주말 아침의 일곱 시 삼십 분은 우리처럼 작은 호텔에서는 이른 시간이다. 조식 손님 모두가 스크램블과 달걀 프라이를 주문한 듯했다. 계란 전용 주물 미니 팬이 총동원되었다. 평소라면 조식 시간까지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했다. 하루 중 유일하게 몸도 마음도 느긋한 시간. 빵을 굽고 커피를 준비하고 오븐에서 갓 나온 뜨거운 빵에 부드러운 버터를 발라 먹는 시간. 주인 할머니가 주방으로 내려오기 전 30분. 그날은 빵과 커피를 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호텔 주인 할머니 딸 니콜이 출근 후 커피 잔을 가지러 주방에 들렀다가 무슨 일로 홀이 이리 소란하냐고 물었다. 미나가 조식을 일찍 원하는 그룹이라고 설명했다. 사단은 언제나 딸 니콜과 주인 할머니의 대립에서 시작된다. 그날도 그랬다. 커피를 넉넉하게 준비해 두라는 딸. 한 잔이라도 남는 게 아까운 할머니. 과일을 냉장고에 보관하라는 딸. 열대 과일은 실온에 두어야 한다는 할머니. 두 사람의 의견은 사사건건 달랐다. 그날의 사단도 니콜의 다음과 같은 지시 때문이었다. 미나는 홀을, 마리는 주방을 사수할 것.


그러려면 미나에게 계란과 팬을 넘겨받아야 했다. 당장 계란 준비를 마리에게 넘기라는 니콜의 말에 내게 프라이팬을 양보하기는 했지만 미나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있다. 사소하지만 본인에게는 의미가 있는 일. 절대로 양보하고 싶지 않은 일. 미나에게는 계란이 그런 모양이었다. 처음 두 번 정도는 그런대로 양호했다. 문제는 주물 팬이 다 떨어져서 얇은 미니 팬 두 개에 버터를 잘라 넣을 때였다. 버터가 기름에 닿자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튀어올랐다. 아침의 불운은 버터와 함께 시작되었다. 하필 개수대 앞에서 그릇을 씻던 주인 할머니에게 딱 걸렸다.





팬과 계란은 당장 미나에게 반납되었고, 나는 주방 임시 추방령을 받았다. 홀에 나가 테이블을 치울 때는 서러웠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나. 팬이 그 모양이어서 그랬다 는 변명은 치사해서 못했다. 지난 1주일 동안 미나가 룸 청소를 위해 일찍 주방을 떠나고 나 혼자 뷔페를 준비할 때도 그랬다.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 늑장을 부리는 걸로 생각하셨나 보았다. 일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쓰던 재료들을 싹싹 치우고 한 번은 주방의 전등 스위치를 끄기도 했다. 몇 번은 일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퇴근하라 했다. 할머니에겐 내가 늦는 만큼 지불할 돈이 추가되는 셈이라 그런 듯했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지난 2주 동안 아무리 바빠도 미나와 불평 없이 잘해 왔는데 뜬금없이 홀은 경험 많은 미나에게 맡기고 주방을 사수하라질 않나. 기름에 버터가 튀어 오른다고 주방을 나가라 하질 않나. 이런 게 사회 초년생의 설움인가 싶었다. 시급 9유로에 쉬는 꼴을 못 보는 주인들이 어찌 할머니뿐이겠는가. 이 나이에 이런 걸 못 견디면 어쩌나. 심호흡을 하고 물을 마시고 표정 관리도 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자존감. 어설픈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다.





니콜에게는 나중에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는데 뭐라 할 것인가. 자기 말을 임의로 거부한 게 아니라는 해명만은 꼭 필요했다. 할머니에겐? 아무 말 안 했다. 마음 같아선 내 시간은 당신이 주는 시급보다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너무 유치해서. 할머니 반응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급하면 좋은 말 나오기 어렵다. 오늘 내가 꼭 하고 싶은 그다음 찾아온 미나의 위로. 전쟁 같은 세 시간 반이 지나고 미나가 케이크 한 조각을 건네며 내게 말했다.


'괜찮아, 마리. 할머니가 무슨 소릴 해도 신경 쓰지 마. 나도 처음엔 온갖 말을 다 들었어. 니 마음 이해해. 그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해. 절대로 마음에 담아두면 안 돼. 너 자신을 위해서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 알다마다! 그날 내겐 그 한 마디가 필요했다. 괜찮다는 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이해한다는 말. 진심에서 나오는 위로는 눈물을 부른다. 볼 위를 구르는 눈물 한 방울로 고마움을 전했다. 그녀가 나를 안아주었다. 그날 나는 미나에게 빚졌다. 기억했다가 언젠가는 되갚아야 빚을. 한 번은 반드시 갚고 싶은 빚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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