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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Oct 09. 2019

뮌헨에서 친구를 다시 만나다

기형도의 시를 생각하다


시인이 없다면 주인이 없는 동안 홀로 남겨진 세상의 빈 집들이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고맙다, 시들. 고맙다, 시인들.


시인이 술값을 내준 이에게 답례로 써준 글(왼쪽/오른쪽)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친구를 다시 만났다. 작년 연말쯤 얼굴을 보고 못 만난 친구다. 우연히 연락할 일이 생겨 톡을 했더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잔 하자길래 금방 약속을 정했다. 옥토버 페스트가 끝나면 한가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뮌헨에도 메세가 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메세 Messe 하면 가을에 북 메세가 열리는 프랑크푸르트가 유명한데. 그런데 뮌헨에도 크고 작은 메세가 자주 열린다고. 메세란 서울의 코엑스, 부산의 벡스코처럼 국제전시회를 말한다.


친구는 월요일 오후 카페 이탈리에서 만났다. 친구를 처음 만난 곳은 빅투알리엔 옆 스타벅스였다. 일이 늦게 끝나서 약속보다 늦게 나갔다. 만나니 밀린 이야기가 많았다. 열심히 일하던 친구는 젊을 때 살던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올 생각이란다. 떠나기 전에 만나서 다행이었다. 고마웠던 건 겨우내 살 나라를 결정한 후 내 생각이 났다고. 그곳에는 글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언젠가 내가 그곳에 가든 못 가든 친구가 머무는 그곳이 자주 생각날 것이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이를 같이 픽업해서 집으로 왔다. 조카와 조카 친구가 오기로 한 건 다음 날로 연기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집으로 오는 길에 빵집에 들러 바게트를 샀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방울토마토를 잘라 브루스케타를 만들었고,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에서 사 온 믹스커피 물을 올렸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는데 그 친구는 속과 겉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장점이었다. 솔직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저녁이 되었다.



출처: 미상(왼쪽) 네이버 블로그 <필사하는 남자>(오른쪽)



친구는 저녁을 하러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올봄에 한국을 다녀올 때 조카를 통해 한국에서 발견한 맛이 청포도 사탕이라 했다. 우리 아이에게 물으니 자기도 좋아한단다. 아이들이 좋아할 땐 이유가 있는 법. 친구가 가방에서 사탕을 네 개 꺼내서 우리도 하나씩 먹고 아이에게는 두 개를 주었다. 여기 한국 슈퍼에도 이 사탕 팔아요, 이 말에 청포도 사탕 사 먹으라고 용돈까지 받았다. 나는 믹스 커피 몇 개로 보답했다. 남편분과 같이 마시라고.


남편에게도 안부를 전하내 이름을 기억한다고 했다. 독일 사람에게 기억될 만큼 쉬운 이름은 결코 아닌데. 반갑고 고마웠다.  역시 친구의 남편을 기억한다. 온화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몇 번이나 만난 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도 한 번. 친구 집에서도 서너 번.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도 오래전에 만난 사람을. 아무 이해 관계도 없이.  가을 우리는 몇 번 더 만날 것이다. 친구가 떠나기 전에. 뮌헨의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친구를 보내고 기형도의 시가 생각났다. 친구처럼 깔끔하고 단정하던 친구의 집도. 친구가 없는 동안 내가 그 집을 많이 생각해줘야겠다. 친구의 빈 집. 기형도의 빈 집. 가을은 기형도다. 그의 시다. 아마도 겨울도 그럴 것이다. 세상에 시가 없다면 글도 써지지 않고 책도 읽히지 않는 날에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세상에 시인이 없다면 주인이 없는 동안 홀로 남겨진 세상의 빈 집들이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고맙다, 시들. 고맙다, 시인들.



광명믜 <기형도문학관>



by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정거장에서의 충고

by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잊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끔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로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은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 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 들어서는 안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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