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없다면 주인이 없는 동안 홀로 남겨진 세상의 빈 집들이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고맙다, 시들. 고맙다, 시인들.
시인이 술값을 내준 이에게 답례로 써준 글(왼쪽/오른쪽)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친구를 다시 만났다. 작년 연말쯤 얼굴을 보고 못 만난 친구다. 우연히 연락할 일이 생겨 톡을 했더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차한잔하자길래금방 약속을 정했다. 옥토버 페스트가 끝나면 한가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뮌헨에도 메세가 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메세 Messe 하면 가을에 북 메세가 열리는프랑크푸르트가 유명한데. 그런데 뮌헨에도 크고 작은 메세가 자주 열린다고. 메세란 서울의 코엑스, 부산의 벡스코처럼 국제전시회를 말한다.
친구는 월요일 오후 카페 이탈리에서 만났다. 친구를 처음 만난 곳은 빅투알리엔 옆 스타벅스였다. 일이 늦게 끝나서 약속보다 늦게 나갔다. 만나니 밀린 이야기가 많았다. 열심히 일하던 친구는 젊을 때 살던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올 생각이란다. 떠나기 전에 만나서 다행이었다. 고마웠던 건 겨우내 살 나라를 결정한 후 내 생각이 났다고. 그곳에는 글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언젠가 내가 그곳에 가든 못 가든 친구가 머무는 그곳이 자주 생각날 것이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이를 같이 픽업해서 집으로 왔다. 조카와 조카 친구가 오기로 한 건 다음 날로 연기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집으로 오는 길에 빵집에 들러 바게트를 샀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방울토마토를 잘라 브루스케타를 만들었고,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에서 사 온 믹스커피 물을 올렸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는데 그 친구는 속과 겉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장점이었다. 솔직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저녁이 되었다.
출처: 미상(왼쪽) 네이버 블로그 <필사하는 남자>(오른쪽)
친구는 저녁을 하러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올봄에 한국을 다녀올 때 조카를 통해 한국에서 발견한 맛이 청포도 사탕이라 했다. 우리 아이에게 물으니 자기도 좋아한단다. 아이들이 좋아할 땐 이유가 있는 법. 친구가 가방에서 사탕을 네 개 꺼내서 우리도 하나씩 먹고 아이에게는 두 개를 주었다. 여기 한국 슈퍼에도 이 사탕 팔아요, 이 말에 청포도 사탕 사 먹으라고 용돈까지 받았다. 나는 믹스 커피 몇 개로 보답했다. 남편분과 같이 마시라고.
남편에게도 안부를 전하니 내 이름을 기억한다고 했다. 독일 사람에게 기억될 만큼 쉬운 이름은 결코 아닌데. 반갑고 고마웠다. 나 역시 친구의 남편을 기억한다. 온화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몇 번이나 만난 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도 한 번. 친구 집에서도 서너 번.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도 오래전에 만난 사람을. 아무 이해 관계도 없이. 이 가을 우리는 몇 번 더 만날 것이다. 친구가 떠나기 전에. 뮌헨의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친구를 보내고 기형도의 시가 생각났다. 친구처럼 깔끔하고 단정하던 친구의 집도. 친구가 없는 동안 내가 그 집을 많이 생각해줘야겠다. 친구의 빈 집. 기형도의 빈 집. 가을은 기형도다. 그의 시다. 아마도 겨울도 그럴 것이다. 세상에 시가 없다면 글도 써지지 않고 책도 읽히지 않는 날에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세상에 시인이 없다면 주인이 없는 동안 홀로 남겨진 세상의 빈 집들이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고맙다, 시들. 고맙다, 시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