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사랑한 사람, 세르게이

호텔 16

by 뮌헨의 마리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 문학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림을 사랑한다는 것. 책과 피아노와 가을과 낙엽과 시월과 파란 하늘과 흰구름을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밑천인가.



가을 한낮의 피아니스트의 연주. (세르게이 아님!)


우리 호텔 주인 할머니의 며느리는 러시아 여자다. 이름은 올가. 주인 할머니와 딸 니콜과 올가 명은 서로 영어로 대화한다. 깐깐하신 주인 할머니가 외국인 며느리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시던지! 사람이 다시 보였다. 그녀도 독일어가 능숙하지 못하다. 한 번은 할머니 딸과 며느리가 주방에서 대화를 하는 걸 내가 거든 적이 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저절로 말이 나왔다. 아이 학교에서도 같은 모임이 직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니콜이 싱글이라는 것도 그때 눈치챘고.



올가: 오늘 저녁에 아이 유치원에서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 제목이 대체 무슨 이야?

니콜: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나: '학부모 모임'을 말하는 거예요.



올가의 아버지는 세르게이다. 딸과 함께 뮌헨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호텔에도 자주 오는 편이다. 할머니 말로는 일주일에 한두 번 일을 도와주러 온다고. 세르게이가 호텔에 오는 날엔 호텔 조식이 끝난 후가 대부분이다. 할머니의 부탁으로 그의 점심을 몇 번 챙겨주다 통성명을 했다. 서로 이름을 부른다. 세르게이는 독일어도 영어도 안 된다. 그럼 무슨 말로 대화를? 독일어로 물으면 러시아어로 대답한다. 신기한 건 어떻게든 통한다는 것. 이참에 미나와는 기초 이태리어를, 세르게이와는 생초짜 러시아어에 도전해 볼까?


어제는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피아니스트가 우리 호텔에 묵었다. 뮌헨의 연주회에 온 모양이었다. 홀을 정리한 후 주방에서 다음 날 뷔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누가 홀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단번에 귀를 사로잡는 터치였다. 힘이 있으면서 유려했다. 치즈 쟁반을 내려놓고 홀로 달려가니 세르게이가 먼저 와서 피아니스트의 뒷모습을 찍고 있었다. 얼굴에 넘쳐나는 미소. 분명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아, 세르게이는 음악을 사랑하는구나. 얼마 전에 그날이 푸틴의 생일이라며 엄지 척한 것도 바로 용서가 되었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 문학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림을 사랑한다는 것. 책과 피아노와 가을과 낙엽과 시월과 파란 하늘과 흰구름을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밑천인가. 피아니스트는 20-30대의 단아한 체구를 가진 남자였다. 나 역시 주인 할머니가 없을 때 재빨리 사진을 찍고 들어왔다.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끝났을 때 세르게이는 그에게 다가가 연주가 훌륭했노라고, 아름다운 음악이었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려고 노력했다. 하도 목소리가 커서 주방까지 들렸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랬다.



세르게이: 당신 음악 굿이다. 나 러시아 사람, 당신은?

피아니스트: 저는 스페인에서 왔습니다.

세르게이: 오 스페인! 스페인 어디? 바르셀로나? 난 모스크바.

피아니스트:아뇨, 저는 마드리드요.

세르게이: 오 마드리드, 굿! 난 세르게이. 당신은?

피아니스트:저는 안드레아 블라블라입니다.

세르게이: 당신 음악 정말 아름답다. CD(있나)?

피아니스트: 감사합니다. 유튜브가 있습니다.

세르게이: 오 유튜브, 굿굿!...



대화는 한동안 더 이어졌다. 사람이 감동을 하면 용감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르게이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오래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피아니스트의 목소리는 그의 음악처럼 단정하고 겸손했다. 잠시 후 주인 할머니 프라우 코프나 목소리 등장. 할머니의 현란한 영어와 프랑스어와 함께. 피아니스트가 영어보다 불어가 편했나. 그의 불어는 버터처럼 부드러워 잘 들리지 않았고, 할머니의 불어만 체호프 <갈매기> 무대 위 여주인공 아르카디나처럼 독보적이었다. 세르게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처럼 기쁨 가득했ㄷㆍ 그의 모습은 피아니스트가 선물한 가을날처럼 오래 기억될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서점에 앉아 졸던 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