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들이 말한다

호텔 17

by 뮌헨의 마리


가을 저녁은 얼마나 품위 있나. 가을밤은 얼마나 적적해서 좋은가. 가을 새벽의 공기는 얼마나 차고 맑은가. 가을의 대낮은 또 얼마나 텅 비고 좋은가.





오늘은 시월 하고도 이십 오일. 시월도 일주일이 남았다. 예고 없는 이별은 없다. 다음 주는 아이의 가을 방학. 뮌헨의 연중 전통시장 아우어 둘트도 끝나고 다음 주부터 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진다는 예보를 듣는다. 이런 게 예고의 정석이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옛 연인 같다. 그리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자. 시월의 마른 등과의 이별을. 나 역시 마음을 접고 돌아설 채비 말이다. 시월의 절친은 십일월. 그러나 쌀쌀맞고 까다롭다. 무난하게 지나가려면 통성명을 해야지. 십일월의 차가움을 피할 도리는 없으므로. 표정 관리도 필수다. 흔들리는 속마음을 들켜서는 안 되니까. 십일월의 보디가드는 바람. 천리마보다 발 빠르고 말도 빠른.





노랑이 이렇게 예쁜 줄 독일에 와서 처음 알았다. 한국처럼 봄이면 피는 노란 개나리. 그보다 먼저 피는 노란 뿌리 꽃들. 4월 중순쯤 부활절에 맞춰 땅 위로 고개를 내미는 작고 노란 꽃들. 가을의 노란 국화. 한국에만 국화가 있는 게 아니었구나. 얼마 전 빅투알리엔 마켓에서도 아우어 둘트 전통 시장에서도 노란 국화가 가득한 화분을 보았다. 꽃만 보고 있으면 내가 선 곳이 멀고 먼 땅이란 사실을 잊는다. 꽃이 주는 위로. 그리고 노란 집. 고흐의 노란 집만큼 샛노랗거나 연 노란. 거기다 가을의 노란 단풍. 이상하게 낙엽들의 무심한 노란색이 더 애잔하다. 진짜로 가는 거야? 이렇게 끝인 거야? 마지막 잎새들이 묻는다. 한 목소리로 외친다. 이것은 노래가 아니다. 절규다. "가을아, 가지 마!!!" 절대로 내 말이 아니다. 밤새 직접 들은 소리다.





이번 주는 정오에 호텔 일이 끝났다. 12시 30분. 얼마나 경쾌한 시간인가. 짧은 오전은 끝나고, 길고 긴 오후와 저녁과 밤의 시간. 가을 저녁은 얼마나 품위 있나. 가을밤은 얼마나 적적해서 좋은가. 가을 새벽의 공기는 얼마나 차고 맑은가. 가을의 대낮은 또 얼마나 텅 비고 좋은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 하며 바람 하며 하늘 하며. 심심하다고 낙엽도 한두 개. 사람도 가을에 생각나는 사람이 제격이지. 나는 언제쯤 한국의 가을과 만나나. 그립고 그리운 한국의 가을을. 독일의 십일월은 만나기 겁나는 애인 같고, 한국의 십일월은 헤어졌어도 늘 생각나는 다정한 사람 같다. 가을, 언제 봐도 멋지구나. 또 보자, 가을. 곧 만나자, 가을. 너는 가지만, 나는 너를 보내지 않는다. 너는 이미 돌아섰지만, 나는 너를 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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