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의 사촌 다니엘라

by 뮌헨의 마리


주위를 단박에 밝히던 예전의 화사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니엘라가 다녀갔다. 그녀가 우리 집 소파에 앉았다 간 시간은 딱 45분. 정확히 말하자면 내 사촌은 아니고 남편의 사촌이다. 빼빼 마른 바바라를 따라 나타난 그녀의 몸이 현관을 가로막자 부엌이 더 협소해 보였다. 밤공기는 유난히 더 덥고. 눈치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내가 제안했다.


"우리, 거실로 갈까?"


현관에서 거실까지는 복도를 지나야 한다. 내 책들이 키높이 책꽂이에 5m가량 줄 지어 꽂혀 있는 곳. 방문자들과의 유쾌한 대화는 언제나 내 책들로 시작한다. 한국 손님이 아닌 한 한국어로 된 책을 본 사람은 별로 없으므로. 그것도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다니엘라 역시 한마디 탄성을 보태기는 했다.


현관과 거실 사이의 복도는 10m. 이 안에 우리 집의 모든 것이 있다. 현관문을 열면 왼쪽에 부엌. 부엌은 작다. 미니멀한 한 끼 식사와 내 글쓰기가 공존하는 곳. 집주인이 아이 때부터 썼다는 부엌 테이블은 ㄱ자형 단단한 스위스풍 벤치. 남편의 3대 자부심인 테라스 체어를 둔 발코니는 덤이다. 작아서 그렇지. 네 개 세트인 의자를 두 개 밖에 놓지 못했다.
책장을 마주 보고 욕실과 미니 화장실. 최근에 개조한 미니 침실까지. 엑스트라 냉장고와 수납장이 딸린 쪽방이었다가 남편이 수납장 아랫칸을 떼내고 침대를 넣었다. 끝까지 반대하던 내가 그 자리에서 반해 버린 방.


오른쪽 책장 끝은 아이방.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방이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까지 혼자 사시다 이 집에서 돌아가신 집주인의 숙모님은 이 방을 거실로 쓰셨던 모양. 늘 이 방 창가에서 거리를 내다보셨단다. 작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건너편 이웃들이 그분을 부르던 이름은 '창가의 할머니'.

독일은 방을 구할 때 거실을 따로 명기하지 않는다. 방 중 하나를 원하는 대로 거실로 쓰기 때문. 우리 집을 예로 들면 방 3.5개(침실/아이방/거실 방/수납용 쪽방), 부엌 1, 욕실 1, 화장실 1. 지하에 작은 창고 하나가 딸려 있다. 독일에서 이사할 때 제일 이해 안 가는 건 부엌을 통째로 들고 가는 것. 조명도 다 떼 간다. 욕조를 안 떼 가는 건 그나마 다행.


우리 집에 들어서는 다니엘라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주위를 단박에 밝히던 예전의 화사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거대한 몸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여전히 말 끝마다 함박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소리에는 생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알았다. 왜 그런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암으로 반년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혼 후 두 번째 남친이었다. 집안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바바라가 소식통이다. 대충 볼 땐 은둔형 스타일인 바바라에게 내가 놀라는 면모다. 다니엘라의 코 밑은 빨갛게 헐어있었다. 슬픔을 너무 누르고 닦기만 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예의 바르게 남편의 삼촌이신 다니엘라의 부친 프리츠와 아비투어를 마친 아들 프레데릭과 우애 좋은 남동생 크리스티안 가족의 안부를 묻고 답했다. 아이가 무심코 스위치를 누른 스테레오에서 밤에나 어울릴 법한 선율이 흘러나오자 그녀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직은 저런 음악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그뿐이었다. 누구도 그녀의 남자 친구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피곤해 보였다. 실제로 지쳤다고도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까지 차로만 6시간을 운전했다며. 내일은 로젠하임 쪽으로 가서 푹 쉬고 싶다고.


우리 집에 머무는 45분 동안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난 건 딱 한 번이었다. 아이 방 가운데에 걸린 다니엘라의 그림. 우리 결혼식 때 그녀가 들고 온 선물. 노랑과 오렌지, 빨강이 조화롭게 휘몰아치는. 그녀의 천성처럼, 밝았던 마음처럼. 집에 걸린 것 중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그녀가 일어서자 우리도 따라 일어났다. 바바라의 집에서 자고 내일이면 뮌헨을 떠날 다니엘라. 동갑인 나와 남편보다 몇 살이 많고 바바라보다 어려서 오십 중반도 안 된 여자. 몇 해 전 어머니를 잃고 아들과 함께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 그의 병간호를 도맡은 여자. 형제라고는 남동생 하나라 주변에 남자뿐인 여자. 언제 또 만날 지 모르는 이제는 나의 사촌이기도 한 여자.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돌아서는 그녀를 불렀다.


"다니엘라! 남자 친구 이야기 들었어. 정말 유감이야. 너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뜻밖이라는 듯 혹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현관 앞 콘솔 위에 놓인 내 결혼식 사진만 바라보던 다니엘라가 말했다.


"너희 결혼식 때가 생각 나. 한국 사람을 그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이야."


그녀도 나도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는 짧게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를 떠났다. 아, 여자의 인생이란! 나는 그 모습이 다니엘라의 마지막이 아니란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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