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독일어가 아니었다. 용기가 먼저. 말은 그다음이었다. 완벽한 준비란 없다. 시작이 곧 완결이고 완성이다. 그 한 걸음과 내딛는 첫발이.
우리집 근처 이자르 강변 공원. 원래 이름은 봄공원(Frühlingsanlage). 곧 봄도 오겠지?
얼마 전에 갑자기누가 물었다. 왜 독일에서 일을 하냐고. 글 쓰는 일을 좋아한다 하지 않았냐고. 뮌헨의 한글학교 우리 아이 반 엄마였다. 한글학교 단톡 방에서 반 대표를 뽑는 날이었다. 그 엄마도 나도 추천을 받았지만 둘 다 고사했다. 나는 미안하지만 풀타임 잡을 시작 해서 힘들 거 같다고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놀란 것 같았다. 작년부터 일을시작한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서울 독일학교에 같이 다녀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내가 독일에서 일할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을 것이다.그런데 그 엄마의 반응에 나도 놀랐다. 자기도 어학 끝나면 일해보고 싶단다. 한국에 있을 땐 '일하면 늙는다'고 하던 사람이!
뮌헨에 온 지 만 2년이지났다. 독일에 오기 전에는 뮌헨에서 책을 읽고 글만 쓸 생각이었다. 이 무슨 신선놀음 같은 말인가. 어느 날 한글학교에서 두 사람을만났다. 두 사람 다 빨리 독일어를 배워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 명은 우리 반 엄마였고, 또 한 명은 막 국제결혼한 젊은 여성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도대체 독일에서 어떤 일을 한단 말일까. 통번역이 아니고 할 수 있는 일에는 어떤 게 있을까. 그럼에도 그 말들이 신선하게 들렸다. 독일에 와서 독일어 교재는 펼쳐 보지도 않던내가 어느 날 갑자기 나도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직접적인 계기는 갱년기였다. 독일에 와서 첫 해에 잠이 안 오고 감정 기복이 컸다. 안 그래도 예민한 편인데 잠까지 못 자면 어쩌란 말인가.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남편과 아이에게 돌아갈 것이다. 갱년기를 빨리 알아차린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변의 일관된 충고는 운동을 할 것. 바쁘게 살 것. 몸을 피곤하게 할 것. 오호라, 역시 난 바빠야 되는구나. 이듬해 봄에 용기를 내어 런치만 파는 한국 슈퍼 안의 작은 식당에 일자리를 구했다. 두 시간 파트타임은 몸이 금방 적응을했다. 가을에 다시 용기를 낸 건 뮌헨의작은 호텔이었다. 독일에 살고 있으니 독일 일터에서 일을 해보는것도 나쁘지 않겠지.그 생각은 옳았다.
뮌헨의 겨울 이자르 강변 풍경
결과적으로 갱년기 극복을 위한 노력이 구직으로 이어진 셈이다. 독일어 실력은 덤으로 따라왔다. 말은 할수록 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가. 날마다 쓰는데 안 늘면 오히려 이상하다. 문제는 독일어가 아니었다. 용기가 먼저. 말은 그다음이었다.완벽한 준비란 없다. 시작이 곧 완결이고 완성이다. 그 한 걸음 내딛는 첫발이. 부족한 것은 일하면서,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채워가면된다. 이후잠을 잘 자게 되었고, 정신 건강에도 당연히 도움이 되었다. 몸이 피곤하니 복잡하거나 길게 생각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자립에 따른 자신감회복과 가계에 보탬이 된다는 자부심도 보너스로 챙겼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글쓰기였다. 처음엔 기대가 적었다. 주변 지인들의 말처럼 일을 하면 쓸거리가 풍성해지리란 생각도 없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글쓰기가 달라지겠나,다만 기분전환은 되겠지 싶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시댁 말고는 주변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독일 생활. 톡으로 대화를 나누는 지인도매번 똑같은 나날들. 그렇게 좋아하던 책 읽기도 독일에 오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 얘기만계속 쓸 수도 없었다. 내가 겪은 일이라고 함부로 썼다간 민폐 아니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일을 시작한 건 그런 면에서 다행이었다.
막상 해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들이 있다. 아침 일찍 침대에서 빠져나오는일. 한 겨울 새벽길을 걷는 일. 안 해본 일이나 싫어하는 일에 도전하는것도 한 가지 예가 되겠다. 내겐 칸티네에서 처음으로 카운터 일을 배운 것. 집에서는 거의 안 하는 다림질이지만 칸티네에서 직원들 근무복을 다림질하는 것. 낯선 독일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일을 시작할 때면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그럴 때마다 한 발자국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눈 딱 감고 한 발을 내딛는일. 앞으로도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선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걸어본 길이라 해서 그것이 다라고 우기지도 않겠다. 우리에겐 모르는 길에 대해 꿈꿀 권리가 있으므로. 독일에서 왜 일을 하는가. 쓸데없는 오기는아니고 극기는더더욱 아니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 한 발 한 발 내가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