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여인 베스나

칸티네 5

by 뮌헨의 마리


나의 동료 나의 사수 베스나. 동유럽 어딘가에서 온 여인. 내게 마가렛 대처보다 더 감동을 주는 철의 여인.


독일 특허청 마당을 지나면 건물 입구가 나온다



1. 이 겨울에 내가 반한 사물들



1월의 새벽길. 흰 눈과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지붕들. 새벽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간혹 지나는 차 소리. 이자르 강물 위로 비치는 불빛. 발 밑에 사각대는 눈. 흐린 새벽하늘에 달무리. 얼굴에 와 닿는 서늘하고 맑은 공기. 새벽 다섯 시. 모두가 잠든 시간. 일하러 가기엔 이른 시간. 도시가 기지개를 켜기 전. 동이 트기도 전. 고요하고 고요한 그 시간을 사랑함. 새벽의 출근길을 사랑함. 새벽 5시에 도착해서 1분쯤 머물다 떠나는 우반을 사랑함. 우반역 계단을 정신없이 뛰어내려 가면 잠시 기다려주던 얼굴도 모르는 우반 기관사를 사랑함. 다음 역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오르면 다섯 시 오분을 가리키는 우반역의 새하얗게 빛나는 둥근 시계를 사랑함. 프라우엔 호퍼 슈트라세 우반역에서 바더 슈트라세로 이어지는 그 거리를 사랑함. 칸티네로 걸어가는 그 영원 같은 10분을 사랑함.


드문드문 불이 켜진 상점들을 사랑함. 어느 가게 안 쇼윈도의 그림을 사랑함. 어린 아들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선 젊은 엄마 아빠의 선량하고 고귀한 얼굴을 사랑함. 희고 검은 고양이 그림을 사랑함. 한 블록을 지나고 다음 블록으로 넘어가는 시간. 텅 빈 그 거리를 사랑함. 거리의 마지막 상점 안 정면 벽에 걸린 대형 초상화를 사랑함. 프로이트 초상화를 가게 안에 걸어둔 주인의 마음을 사랑함. 두 번째 블록을 지나 오른쪽으로 모퉁이를 돌면 왼쪽엔 김나지움. 그 옆의 작은 호텔을 사랑함. 언젠가 다시 호텔로 돌아간다면 한 번쯤 일해보고 싶은 곳. 길가에서 안이 훤히 보이는 호텔 레스토랑 바의 아늑함. 맞은편으로 이어지는 레스토랑 조명의 품격. 내가 일했던 호텔만큼 작고 예쁜 호텔. 매일 새벽 안내 데스크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의 근면 성실함. 한 번도 와 본 없는 호텔 옆의 카페를 사랑함. 그리고 나의 칸티네. 대문 없는 출입문을 지나면 넓은 마당. 그 마당을 사랑함. 건물 1층에서 칸티네 신분증을 보이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 다섯 시 십오 분. 정적 같은 그 시간. 하루의 그 첫 출발을 사랑함.





2. 이 겨울에 내가 반한 사람



나의 동료 나의 사수 베스나. 동유럽 어딘가에서 온 여인. 내게 마가렛 대처보다 더 감동을 주는 철의 여인.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마흔 넘어 아이를 낳은 것도, 각각 열한 살, 열 살짜리 딸을 둔 엄마라는 것도. 남편과 이혼 후 혼자 딸을 키우는 여인. 새벽같이 칸티네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는 어렵겠지. 한 주에 한두 번 저녁마다 지역 신문 배달 알바를 뛴다 여인. 전날엔 진눈깨비가 와서 길이 질퍽거려 힘들었다고. 동작이 빨라 30분이면 세 구역을 돌고 한 달에 300유로를 번다며 웃는 얼굴이 나를 울리던 여인. 저 여인이 내 동료라니! 때론 속상하기도 말을 안 듣기도 하지만 딸이 자신의 전부라는 사람. 모성애라니! 이 나이에 어디서 일자리를 구하냐고, 자기는 일하는 게 좋다고, 일이 있어 행복하다는 이 여인. 독일 남자처럼 체격도 크고 목소리도 크고 험한 말도 잘하지만, 칸티네 일을 자기 집안 일처럼 척척 해내는 그녀의 이름은 베스나. 내가 칸티네를 떠나지 못하면 그녀 때문일 것만 같은 나의 사수 나의 동료. 어깨 수술만 벌써 두 번. 두통과 등 통증에 한 쪽 발마저 이유 없이 부어 올라 남몰래 나를 울리던 사람. 세상에는 그런 여인도 있다. 차디찬 이 겨울에 내가 반한 사람. 먼 동유럽 어딘가에서 온 여인. 그녀의 이름은 베스나. 나의 사수 나의 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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