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처럼 열정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 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운명 앞에서 당당하던 쥘리앵의 모습은 차라리 귀족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픈 사람. 어리석고 불행했으나 미워할 수 없는.
그처럼 열정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 말이다. 책을 펼치기 전부터 출세욕에 불타는 청년 이리라 생각했다. 당연히바람둥이일 테고.정공법으로가기엔붉은 옷의 군인의 길도, 검은 옷의 사제의 길도 만만치 않았겠지. 귀족 여성들을 유혹하는 지름길을 택한 것은 머리가 명민하고 용모가 수려한 그로서는 해볼 만한선택이었을테니까. 프랑스산간소도시 목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날고 기어봐야 뾰족한 수가 없다.이런나의 선입견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대폭 수정되었다.
책을 좋아하고 나폴레옹에 열광하던 19세 청년 쥘리앵은 <세인트 헬레나의 기록>을 열독 했다.루소의 <고백록>과 함께 그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책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1830년. 나폴레옹은 신분에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만 남기고 영광의 권좌에서 물러났다. 다시 귀족과 성직자가 무대 위로 오르는 왕정복고 시대. 우리의 주인공은 군인이 아닌 신부가 되기로 했다. 돈만 밝히는 야비한 아버지와 무자비한 형들로부터 떠나는 방법이 그 길 밖에 없어서 목숨이라도걸 작정이었다.
쥘리앵의 내면에는 '어떤 불꽃' 같은 것이 있었다. 일명출세욕. 출중한 외모에 놀라운 기억력도 그에게 남다른 기회를 제공했다. 출발은 그를 좋게 본 노신부에게 라틴어 성경 배우고외우기. 성경책을 통으로말이다. 가상한 노력은그가 살던 소도시 시장 저택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는 행운을 안겨준다. 그 집에서 시장의 아내이자 운명의 여인인 레날 부인을 만난다.자존심 강한쥘리앵을 다정하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여인. 상류 사회에 증오심과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쥘리엥은 그녀와 사랑에빠지지만둘의 관계가 들키기 직전더 큰 야망을완성하기 위해파리로떠난다.
파리에서 거머쥔 쥘리앵의 두 번째 행운은라 몰 후작의 비서로 발탁된 것. 그 집에서는 그의 두 번째 운명의 여인이 될 스물도 안 된 마틸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답고 오만하고 도도한 귀족의 딸. 그런 아가씨를 유혹하는 방법은 뭘까. <적과 흑>(상)과는 달리 <적과 흑>(하)는스탕달이 전하는 밀당의 교과서 같다. 그것도 무려 200년 전에 쓴. 사춘기 청소년들과 연애를 시작하려는20대들에게도 필독을 권한다. 나쁜 남자, 나쁜 여자를 피하는 비결이 궁금한 사람들도 한 수 배울 수 있다. 인생의 무대 위에서 그런 이들에게 끌렸다가 쓸쓸히 퇴장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겐 더더욱강추.
운명은 귀족 사교계의 여왕인 그녀에게 모든 것을 부여해 주었다. 뛰어난 가문, 재산, 젊음, 거기에 미모까지. 그런데도 행복하지 않았다. 문제는 권태. 쥘리앵은 그런 그녀를 경멸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얻었다. 쥘리앵의 삶은 위선의 연속이었다. '배곯지 않고 살아갈 연 수입 1천 프랑'이 없어서. <적과 흑>은 '권태'와 '위선'이 만났을 때 어떤 사랑이 탄생하는지를 보여준다. 마틸드는 위험한 사랑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영혼을 고양하고 권태에서 벗어난다. 줄리앵은 라 몰 후작의 작업으로 줄리엥 소렐 드 라 베르네이로 신분을 세탁하고자신의 소설을완성하지만,발자크의 소설은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갑자기 날아든 레날 부인의 투서 한 장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그리고 이어지는쥘리앵의 레날 부인 살인 미수 사건. 감옥까지 따라온 마틸드의 영웅주의에 불타는 행동에지쳐되살아나는단순하고 순진하며 수줍은 애정에 대한 갈구. 그의 가슴속에 위선과 야망의 불꽃은 더 이상 없었다. 죽음을앞둔감옥 안에서 어떤 '다른 열정'도생겨났는데,그것은 파리의 화려한 성공이 아닌지난날 레날 부인과 함께 했던 고요하고 평화롭고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운명 앞에서담담하던 쥘리앵의 모습은 차라리 귀족적이라고 해야겠다. 당당한 최후 진술도 백미다. 그래서더욱 가슴 아픈 사람.어리석고불행했으나미워할 수 없는.사랑할 때와 죽을 때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 <적과 흑>을 보라!
'다행히 쥘리앵의 사형 집행일에는 청명한 햇살이 온 세상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그 찬란한 햇빛을 보자 쥘리앵도 용기가 솟았다. 그 환한 대기 속으로 걸음을 옮겨 놓으면서 그는 오랫동안 바다에 나가 있던 항해자가 육지를 산책하는 것 같은 평화로움을 느꼈다. 자, 모든 게 잘되어 나가고 있다,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용기를 조금도 잃지 않았어.'
'모든 것이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끝났다. 쥘리앵은 조금도 꾸밈 없는 태도로 자신의 생을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