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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Dec 14. 2019

당신을 위한 인생의 문이 열릴 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by 앤드루 포터


인생의 문은 어디로 열리는가. 수직인가 수평인가. 위인가 아래인가. 옆문인가 정문인가. 앞인가 뒤인가. 보이는 문인가 보이지 않는 문인가. 열려 있는가 잠겨 있는가. 밖은 초원인가 절벽인가. 안은 밝은가 캄캄한가.






여대생 헤더 서른 살이나 많고 노쇠한 이혼한 물리학과 교수 로버트와 우정보다는 짙고 사랑보다는 옅은 차를 나눌 때. 의대생이면서 수영 선수인 콜린과 데이트를 하면서도 로버트와 차를 마시던 그의 아파트온기를 자주 생각할 때. 사랑에 대한 확신 없이도 '젊고 건강하고 고집이 세고 세계에 대한 건강한 낙관으로 가득한 콜린과 함께라면 불행하지 않으리라는 것'알지만, 그럼에도 로버트와 함께 하는 시간이 평온하게 느껴지는 것만은 어쩌지 못할 . 


'그녀가 그의 아파트에 가는 이유는 지금껏 그 어떤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 그의 작은 아파트 테두리 안에 있을 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로버트는 말한다. '난 당신과 얘기하는 것이 좋아요. 그게 다예요.' 그들은 어느 날부터 더 이상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다. 대신에 삶의 내밀한 사정들을 나누었다. 그와 나누는 대화에는 자유가 있었다. 마치 평생토록 어떤 깊은 방식으로 그를 알아온 것 같았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by 앤드루 포터, 21세기 북스, 김이선 옮김)


헤더는 콜린이 졸업한 그해에 콜린과 결혼했다. 로버트와는 3년 동안 때로 편지 교환을 하기도 했으나 나중엔 그마저 끊겼다. 어느 파티에서 로버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과 슬픔을 숨기지 못하는 헤더의 표정을 콜린이 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 밤 그녀는 뜰로 나가 통곡한다. 그 소리를 남편이 들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로버트를 잃고 헤더는 다음과 같은 결론 얻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연인들 사이의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 '우리가 연인에게 비밀을, 진실을 털어놓는 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는 결국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기에.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by 앤드루 포터, 21세기 북스, 김이선 옮김)





그런 행동은 일말의 자기 구제, 스스로의 죄의식을 덜기 위한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헤더는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다. 젊을 땐 아니라는 쪽에 가까웠는데, 나이가 드니 헤더의 손을 들어줄 용의가 생겼다. 헤더여, 그대는 사랑에 최선을 다했다. 그대 앞에 열린 인생의 문 앞에서 저하고 서성인 것도 괜찮다.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살다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있다. 그대는 최선의 선택했고, 그 이후 아픈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추운 겨울날 난롯가에 앉아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책. 헤더의 마음과 만나기 좋은 계절이다. 살면서 그럴 수도 있지. 가보지 못한 길이 있듯 누구에게나 선택하지 못한 사랑과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도 아니고 모두가 겪는 일은 아니라 지라도. 단편소설을 읽고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기분을 선사하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집 앞 작은 베트남 식당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연어 초밥을 산 날. 스시와 함께 받은 행운의 과자 속에서 발견한 문장이 작가 앤드루 포터와 헤더를 떠올리게 했다. 행운의 문구는 이랬다. '당신을 위한 문은 당신 인생의 곳곳에서 열릴 것이다'.






싸고 맛있는 초밥을 두 번이나 더 사러 갔더니 이런 문구를 차례로 선물로 받았다. '삶은 당신에게 유쾌한 변화를 던져줄 것이다'. '행복한 소식이 당신에게 오고 있다'. 거기다 새벽의 출근길에서 만난 영화 포스터도 한 장 추가해야겠다. <우리 생이 가장 빛날 때 Die schönste Zeit unseres Lebens> 겨울에 꼭 어울리는 책과 영화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않았다. 어떤 책과 영화는 헤더의 처럼 비밀스럽게 문 뒤에, 침대 밑에, 두고두고 숨겨두 싶은 법이니까. 내게는 인생이 어떤 문을 열어줄 궁금해하면서.


문이라고 다 같은 문은 아니다. 인생의 문은 어디로 열리는가. 수직인가 수평인가. 위인가 아래인가. 옆문인가 정문인가. 앞인가 뒤인가. 보이는 문인가 보이지 않는 문인가. 열려 있는가 잠겨 있는가. 밖은 초원인가 절벽인가. 안은 밝은가 캄캄한가. 해가 떠오르는 쪽인가 석양이 지고 노을이 물드는 쪽인가. 바다를 향하는가 산인가 호수인가. 밤낮없이 눈비 흩날리고 밤이면 숲이 짐승처럼 울고 가을이면 낙엽이 겨울이면 눈이 대책 없이 쌓이는가. 인적은 드문데 불안이 수시로 문을 두드리고, 적막과 고독만이 정다운 이웃처럼 들르는가. 작별을 고하러 십이월이 벌써 문 밖에 서 있다. 문을 열어줄까 말까 나는 아직도 고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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