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나는 한 수 배웠다. 체리나무 아래서. 당연한 마음을 모른 척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하여 유월의 햇살 아래서는 모든 것이 빛난다. 사랑하는 마음도 이별하는 마음도.
요양원 옆 성당 마당의 벤치와 탁자들
어느 날 뮌헨에해가 나왔다. 찬란한유월 중순의 오후였다. 퇴근길에 요양원 옆 성당 마당에 들렀다. 그동안 모든 것이 비에 젖어 축축했다. 나무들도, 자갈길도, 나무 탁자와 벤치도. 학교를 마친 아이가 절친 율리아나 집에서 숙제를 하고 놀다 오겠다는 톡을 받은 후였다. 집에서 일하던 남편도 아이 점심을 챙기지 않아도 되니 외출을했다. 그럼 나는 체리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지? 책을읽을까,글을 쓸까.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벤치에 앉아 세 시간을 보냈다.햇살과 그늘의 밀당을 지켜보면서. 아무도눈치 못 채게은근슬쩍 훈수도 두어가면서.
야외4인석 테이블 벤치에는 못 보던 담요가 놓여있었다. 성당지기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날씨가 좋으면 김나지움 학생들이 가끔 와서 공부를 하고 간다고. 그리하여조금 떨어진 체리나무 아래에 앉기로 했다. 2인석 벤치에는 햇볕과 나뭇가지 그늘이 반반씩차지하고 있었다. 운 좋게 양해를 구해 함께 앉을수 있었다. 벤치 아래 파릇한 잔디 사이로 빨간 체리들이 구슬처럼 빛났다. 가지마다 덜 익거나 다 익은 체리들이 빼곡했다. 뮌헨의유월은체리의 계절. 매일매일달콤하고 새콤한 검붉은 체리를 먹을수 있는 계절.
유월의 바람은 선선했고, 묵직한가지들과 촘촘한 나뭇잎들이소리도 없이 흔들렸다.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맑았다. 고요의 반경이얼마나넓었으면 벤치 위 햇살과 그늘의 마음이밀물과 썰물처럼 들고나는 소리가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날 그들의유일한관전자이자 조력자는나였다. 햇살이 한 발 물러서면 체스 말을 옮기듯햇살의 등을 밀어주고, 그늘이 등을 돌리면바람이나무 몸통을휘감듯 그늘의 몸을돌려세웠다. 그날도 나는 한 수 배웠다. 체리나무 아래서. 당연한 마음을 모른 척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하여 유월의 햇살 아래서는 모든 것이 빛난다. 사랑하는 마음도 이별하는 마음도.
<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이숲에올빼미, 배정희&남기철 옮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작가가 있다. 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복한 유대인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형이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덕분에츠바이크는문학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빈 대학에서철학을, 베를린 대학에서 독일 문학과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소설가이자 세계 3대 전기 작가로 꼽힌다.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살았던작가츠바이크는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을 깊이 탐색했다.철저한 개인주의자로 부와 명성을전부 누렸지만,평생 자기 작품의 가치를 의심했고,세계 대전으로 쑥대밭이 된 유럽의 상황을 목도하며 우울증이깊어갔다.
첫 번째 부인은 여류 작가 프리데리케 마리아 부르거. 그녀와는이혼 후에도 마지막까지 평생의 친구로 지냈다. 중년의 나이에 젊은 여비서 로테 알트만과 재혼했다. 1941년 브라질로 망명하여 이듬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 로테와 함께.뛰어난 심리 묘사를 보여주는작품들은장편 <미안한 마음 Ungeduld des Herzen>,중편 <낯선 여인의 편지 Brief einer Unbekannten>, 마지막 단편인 <체스 Schachnovelle>. <체스>는 츠바이크 사망 1년 후 1943년에 출간되었다. <세 사람의 거장: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세 작가의 인생: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등이 있다.
미발표작이었던 <이별여행 Die Reise in die Vergangenheit>은 1987년에 출간되었다. 가난한 젊은이가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 유망 기업 사장의 비서로 일하다가 그의 젊은부인과 사랑에빠진다. 출세를 위해 사장이 제안한 멕시코 광산 개발 책임자로 갔다가 세계대전의 여파로 발이 묶여유럽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긴 편지로 애를 태우던 두 사람이재회한 건 9년의 세월이 지난후였다.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사랑을 보상받고자그는그녀에게마지막 이별여행을 제안하는데. 그들의 사랑과 이별의 여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유월은 체리의 계절!
'그녀는 다른 존재였다. 아니, 비교할 수조차 없는, 차원이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그녀는 감히 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상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지극히 순수한 여인, 손댈 수 없는 존재였다.'
'하인과 악수하면서 그는 마치 오디세우스가 된 기분이 들었다. 오디세우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 집의 개들은 너를 기억할 것인가? 여주인은 너를 알아볼 것인가? (...) 두 사람은 손을 부여잡은 채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짧지만, 마술처럼 충만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얼마나 정직한가. 그녀는 혼란 속에서도 명철하고, 진실하며, 용감하고, 의연하며, 그의 연인이었던 그때의 그녀 모습 그대로 언제나 경이로울 정도로 자신을 지키고,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 있었다.'
'이번 여행은 이별여행이 되리라고 했다. 그 마지막 이별, 깊고 깊은 이별을 그는 원하고 있다고, 이 마지막 이별의 저녁, 마지막 이별의 밤을 그녀에게 요구한다고 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p. s. 다음 주 그 벤치는 사라지고 없었다.어디로갔는지는모른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음에도 허전한 마음 감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