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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Apr 17. 2020

독일 국적으로 안 바꾸길 잘했다

영원한 대한한국 국민으로 살기


수백 명의 어린 영혼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책임감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만이 지금 우리의 몫. 깨어있는 시민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코로나 속에서도 차분하게 투표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 감동일 뿐이다.




내가 독일에 살기 시작한 건 2002년 새해였다. 날씨마저 화사했던 그해 유월 첫날에 이른바 유월의 신부가 되었는데 마침 2002년 한일 공동주최 월드컵이 결혼 서막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첫 인생 중대사 아닌가! 월드컵과 겹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결혼식을 마쳤다. 한국에서 온 가족들과 허니문 대신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와 로맨틱 가도를 달렸다. 남편이 대형차를 렌트해서 직접 운전을 했다. 그 길 위에서 한국팀은 기적처럼 승승장구했다. 나중에는 각각 재혼하신 양쪽 시부모님을 방문해야 했는데 한국이 너무 잘해서 우리 가족은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독일의 중부 헤센 지방의 대학 도시 마르부르크에서 3년을 살다가 중국, 싱가폴, 한국을 돌아 다시 독일에 온 건 2018년 새해. 이번엔 아이와 함께 셋이었다. 어디로 갈지는 내가 정했다. 나와 아이가 해마다 한국으로 오가기 쉬운 곳. 직항이 있어 한국의 가족과 지인들의 방문 쉬운 곳. 주말 한글학교가 있는 곳. 글을 쓰기 좋은 문화 인프라가 구비된 곳. 독일에서 글을 쓰고 있어요, 할 때 지명을 듣고 바로 아하! 알 수 있는 곳. 남편의 사업 첫출발로 적합한 곳. 독일 시댁 부모님들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 그래서 뮌헨이 되었다. 뮌헨은 한국의 전혜린과 이미륵의 도시이기도 했다.


독일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결혼할 때부터 주변의 권유가 있었다. 내 나이는 젊은 30대였고, 한국의 위상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일본이 대세였고, 중국이 꿈틀대던 때였다. 그때 내가 품었던 대한민국의 희망은 대선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이 이긴 것 정도였다. 지금도 그날 그 시간을 기억한다. 당시에 스마트폰이 어디 있으며 노트북이 어디 있나. 컴퓨터와 전화가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아침이었다. 우리 집 창문으로 마르부르크 성이 보였다. 햇살이 환했다. 희망의 감이 왔다. 그리고 해냈다!  이후 국적을 바꾸는 일은 돌아보지도 않고 폐기 처분했다. 운전면허증만 바꿨다.



뮌헨의 봄!



브런치 작가 중에 나무산책이란 분이 있다. 프랑스에 살며 유럽의 삶과 사람과 문화를 심도 있게 비교 분석하는 작가다. 최근 작가의 글 중에서 국적을 프랑스로 바꾸지 않은 것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을 읽고 무릎을 쳤다. 나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서 한국의 촛불과 대선을 무사히 치르고 2018년 독일로 오자마자 또 월드컵이 열렸다. 월드컵이 계속 우리를 따라다니는 기분이었다. 다시 독일은 초상집. 아이도 기뻐하다가 슬퍼하다가 정체성에 첫 혼란을 느꼈다. 월드컵 직전에는 남북한 정상회담이 대문짝만 하게 독일의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기적 같은 일들의 연속이다. 코로나와 선거. 지난 이틀 동안 인터넷 기사를 내리읽고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세상 어디서도 해내지 못하는 일을 그것도 더블로 내 나라가 해내다니! 나는 영원히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 남편과 아이는 독일과 미국의 시민권자다. 하나도 부럽지 않다. 한국 국적도 보유한 아이는 언젠가 한국과 독일 중 한쪽을 택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이태리에서 나고 자란 후 인생의 절반을 인도에서 살기로 결심했던 우리 형부도 한국에 살고 있다. 매일 한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놀람과 경탄을 반복하시면서.


오늘 아침 지인이 보내준 대한민국 대표 가수 34인이 부르는 <상록수>를 유튜브 영상으로 보다가 가슴이 뭉클했다. 전세계가 코로나의 어두운 터널을 잘 통과하자고 노래로 전하는 메시지다. 손에 손잡고 말이다. 그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맑고 밝았다. 대한민국은 저런 나라다. 산적한 문제가 산더미라는 것도 안다. 선거는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것도 안다. 험난한 일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 한 발 옮기는 수밖에. 지금처럼. 수백 명의 어린 영혼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책임감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만이 지금 우리의 몫이므로. 깨어있는 시민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코로나 속에서도 차분하게 투표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 감동일 뿐이다. 이런 나라가 내 나라라니. 국적을 바꾸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아침부터 가슴을 쓸어내린 휴무날. 독일은 맑음. 내 마음도 푸르다.



집 앞의 나무들. 새잎이 났다고 금방 초록이 울창해지진 않지만 그런 날은 반드시, 곧 온다!



p.s. 이 글을 쓰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상록수>듣다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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