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가을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테레지엔 비제를 걸었다. 가슴속은 만추로 가득한 지 오래. 빈 벤치에는 빗방울과 물방울로 촉촉하고 촘촘하게 서로를 덮어주던 잎들. 아무런 말도 없이.
옥토버 페스트가 열리던 장소, 테레지엔 비제의 산책길
시월도 한 주를 남겨두고 있는 주말 아침이었다. 뮌헨에는 비가 내렸다. 차가운 비가 아니고 따뜻한 가을비. 아이를 한글학교에 데려다주고 노란 우산을 들고 지하철역 주변을 배회했다. 내리는 비에거리는 이미 낙엽들의 세상. 은행잎도 아닌데 왜 다들 노란색일까. 한국에서 가을마다 걷던 한남동 오거리도 생각났다. 이맘때면 가로수길이 은행과 잎으로가득했는데. 한남동 버스 정류장의 높은 돌담을 뒤덮던 능소화는 어떻게 됐을까. 여름에는 능소화를 보아야한다.능소화 없는 여름이 어디 여름인가.
토요일 아침 한글학교 가는 길에 노란 낙엽들 사이로 붉은 단풍잎을 보았다. 남편이 아침 9시에 차려준 빵과 커피로 서둘러 아침을 먹고 셋이 함께 집을 나섰다. 지각을 할 리도 없건만 아이는 자꾸만 잔소리를 했다. 길에 떨어진 낙엽을 주우려는 엄마. 말리는 아이. 그렇게 곱게 물든 붉은 낙엽을 자주 못 보니까 그런건데. 눈치껏 두 개를 주워 들자아이가 말했다. 낙엽을 귀찮게 하지 말고 제발 가만히 두라고. 그게 안 되는데 어떡하란 말인가. 저대로도 좋지만 엄마 사진 속에서 언제까지나 살아있어도 좋지 않나. 하긴그걸 알면 애가 아니지.
가을이면 옥토버 페스트가 열리던 테레지엔 비제 들판.
아이와는 한글학교 지하철 역앞에서 헤어졌다. 토요일 오전3시간의 자유가 손안에 쥐어지는 짜릿한 순간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평소대로 카페로 직행하지 못한 건 노란 물결 때문이었다. 한글학교에서 옥토버 페스트 장소는 멀지 않다. 지하철 역에서 한 블록만 걸어가면 된다. 그 다음 눈 앞에 펼쳐질 들판은 테레지엔 비제 Theresienwiese.지금까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곳의 산책길을잊고 살다니. 맑은 날들 다 지나고 비 오는 어제서야 생각이 나다니. 비 오는 날 사진이 제일 차분하리란 내 예상은 들어맞았다. 저 길들, 저 낙엽들을 못 봤으면 어쩔 뻔했나!
테레지엔 비제에 사람은 없었다. 간혹 자전거를 타고 들판 속으로 사라지는 이들, 조깅을 하며 지나치는 젊은 청춘들이 있을 뿐. 저 광활한 공간 너머에 내가 일하는 카페도 있다. 다음 주에는 일이 끝나면 다시여기로 걸어서 와야지. 테레지엔 비제의 울울창창한 산책길에는 아직도 가로수들이 노란 잎들을 떠나보내지 않았다.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은 마음. 단풍이 남아 있는 한 가을도 끝난 게 아니다. 독일로 온 후 나의 가을은 노란 색이되었다. 뮌헨에 오기 전 이런 가을을 기대한 적도 없었다. 모든 독일의 가을은 춥고 축축한 줄 알았으니까. 오래전에 잠시 살던 중부 독일 마르부르크도 그랬다. 북부는 안 살아봤어도 말해 무엇하랴.
이것이 테레지엔 비제의 만추다!
노란 가을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테레지엔 비제를 걸었다. 가슴속은 만추로 가득한 지 오래. 빈 벤치에는빗방울과 물방울로 촉촉하고 촘촘하게 서로를 덮어주던 잎들.아무런 말도 없이. 혼자라서 다행인 시간이 있다. 어떤 이별의 시도, 사랑 노래도 침범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고독은 아니고 고적한, 외로움보다는 조금 쓸쓸한. 그런 날은 부는 바람이 없이도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언제부터 기다려온 건지도 모르게발 아래 우수수수 떨어지는 여린 존재들. 그 찰나의 파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발 밑에 느낌표가 차오르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로 모면해도 될는지.
카페 마마스로 돌아오자 신발이 다 젖었다. 실내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런 줄도 몰랐다. 뜨거운 섬머 프루트 차를 두 잔이나 마셨는데도 뜨거운 줄도 몰랐다. 가슴속으로 온기가 다 퍼지기 전까지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는 날이 개었다. 오랫동안 못 간 카페 디바도 문을 열었다. 그런 건 멀리서도 금방 알 수 있지. 길 건너편에서도 따스한 불빛이 보였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카페에 들러 주인 라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동네 카페들이 자리를 지켜주는 건 고마운 일. 사람이 바뀌면 몹시도 섭섭할 테니까. 올 가을은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는지 모르겠다. 다시는 못 볼 계절을 보내는 것처럼말이다. 오늘처럼 낙엽이 지지도 못하게 밤을 새워 지키고 있으니. 가을은 알아주겠지, 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