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함께 2020년은 제게도 큰 숙제를 안기고 저물었습니다. 2021년은 상처가 여물 수록 상처 주변이 더욱 단단해지듯 열심히 걷고 먹고 웃으며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구독자님들께도 뜻깊은 한 해가 되시길 바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0.12.31 해가 났다(위). 입원실/휴게실/복도(아래).
2020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 날이 가야 새 날이 오겠지. 그러니 한 해를 보내며 한 자 안 적기도 어렵다. 최근 나는 자궁암 수술을 받고 독일 뮌헨의 종합병원에 입원 중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특별히 해가 나왔다. 그것도 아침부터! 기분이 어찌나 상쾌하던지! 같은입원실에 있는 미라에게서나를 본첫날과 사뭇 달라 보인다는 말까지 들었다. 훨씬 생기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며칠 전 나와 같은 수술을 받고 내 방의 옆 침대로 왔다.
미라는 폴란드 여성인데 40대 싱글인 듯하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키가 크고 몸매도늘씬하다. 우리는그제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었다. 뮌헨에 사는 우리는 퇴원하면 여름에 웨스트 파크에서 열리는 웃음요가에 함께 가기로 의기투합했다. 뮌헨에서 30년을 살고, 한 달의 반은 스위스에서 일하고, 모국어인 폴란드어 말고도 독일어와 영어와 러시아어 등 몇 개의 외국어를 구사하는 그녀에게 독일어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고조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제 아침 기분이 좋았던 건 수술 이후 열흘 동안 나를괴롭히던 명치 통증이 조금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명치끝이 얼마나 아팠는지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었다. 서 있어도 누워도 앉아도 속이 편해야 말이지. 조금만 먹으면 윗배 전체가 더부룩하고 빵빵했다. 내 생애 이런 일은 없었다. 참다 참다 '명치'라는 독일어를 찾아서 우리 병원 산부인과 최고 권위자이신 분께 여쭈었다. 이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수술을 집도하신 전문의이자 교수시다.
"교수님, 제가 '명치'가 아픈데요."
명치라는 독일어 단어 Herzgrube를 못 알아들으셔서 다른 말 Magengrube로 재빨리 바꾸었다. 단어는 이해하셨다. 아 그런데.. 사람이어쩌다가명치가 아프단 말인가, 그런 표정. 그때 알았다. 독일 사람들은 명치가 아프다거나 속이 더부룩하다거나 체하거나 얹힌 것 같다거나 속이 부대낀다거나 그 모든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구나. 소화가 안 돼요. 난제를 받고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온 전문의는 내게 식사는 잘하고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하시는 말씀. 흰 빵 셈멜을 더 많이 먹으라고. 속으로 빵 터지며 겉으로는공손하게 네, 했다.
홀로서기는 12/25일부터 시작했다. 림프절 제거로 다리 부종이 심했다. 수혈 후 혈압은정상으로돌아왔다. (2021.1.1일 자 기준110/60).매일 오전 세 가지를 재는데 체온, 혈압 그리고 산소 포화도다. 셋 다 정상이다. 새해 첫날인 오늘 아침 체온은 36.9°. 손가락 하나에 빨래집게 같은 것을 꽂아 책정하는산소 포화도는 96%~100%가 정상 수치란다. 지금까지 계속 96%를 유지하다가 어제는 97%, 오늘은 98%였다. 100%가 최상의 수치다.수술 후 호흡이 가빠져서 심호흡에신경을 썼더니 도움이 된 것 같다.
27일에 왼쪽 림프줄을 빼고, 28일에 소변줄을, 29일에 오른쪽 림프줄을 뺄 예정이다가 연기되었다. 가장 무거운 소변줄을 빼고 나니 날아갈 것 같았다!상처도 아물어 가는 중이다. 수술 부위가 배꼽 아래에서 명치까지라 걸을 때 가슴을 활짝 펴기가 어렵다는 게 힘들다고 할까. 조심하며 걷는다. 빨리 걷거나 오래 걷지도 못한다. 하루 4~5회 15분 정도 복도를 느리게걷는다. 소변줄에 관한 에피소드도있다. 소변줄 빼는 전날 걱정이 되었다. 검색해보니 소변줄 빼고 통증이 있다는 말도 있고 해서. 경험이 많아 보이는 나이 지긋하고 풍채도 있으신 간호사님께 물었다.
환자 : "간호사님, 소변줄 빼고 나면 많이 아픈가요?"
간호사: "모르죠 난. 소변줄 달아본경험이 없어서."(메에~)
생각난 김에, 독일 병원에 입원할 때 머스트 해브에 대해서도 몇 자 남겨놓자. 독일 병실에는 호텔처럼 붙박이 장이 있어 가방과 신발과 소지품을 보관할 수 있다.
1) 물건은 여행용 캐리어에 넣어갈 것.
2) 실내화를 챙길 것. 운동화, 부츠, 구두는 불편하다. 매번 신고 벗고? 수술하고 정신없는 그 와중에? 밖에서 신던 거라 위생상에도 안 좋다. 실내화가 없으면 병원에서 주는 미끄럼 방지 양말을 신어도 좋다. 그런데 침대 들락거릴 때마다 신고 벗는 건 아무나 못할 일이다. 독일의 유명한 비르켄슈톡이나 크록스도 좋다. 나처럼 겨울용 털실내화도 신어보니 괜찮다.
3) 욕실(혹은 나이트) 가운과 잠옷. 호텔 가운 같은 것을 생각하면 쉽겠다. 독일의 환자복은 뒤가 터져서 민망하기도 하고 춥다. 욕실 가운은 입원실 밖을 오가거나 복도에서 걷기 연습을 할 때 쉽게 입고 벗을 수 있어 편하다. 무엇보다 따뜻하다. (병원에서 노부인들이 필수로 지참하는 걸 보고 체형이 비슷한 카타리나 시어머니께 한 벌 빌렸다. 안 돌려드리고 기념품으로 간직할 생각이다.) 잠옷도 위아래가 붙고 길이가 무릎 정도까지 오는 일자형/박스형이 좋다. 나도 병원 가운 대신 입고 있다. 잠옷 바지는 소변줄을 달 경우 불가함. (바바라에게 미션을 주자 어제 아침 적당한 걸 사서 보내주었다!)
4) 타월과 칫솔, 치약 등은 개인이 챙겨 와야 한다. (일반 입원실은 1회용 안 줌. 샤워는 그렇다 쳐도 머리를 못 감는 게 제일 아쉽다.) 본인이 좋아하는 차나 책. 2인실 이상일 때 헤드폰이나 이어폰도 필수겠다.
병원조식+조카의 호박죽+병원저녁(위), 다양한 병원 점심 메뉴들(가운데+아래)
어제는 점심때 회오리 무늬가 있는 셈멜빵 대신 돈가스 한 귀퉁이를 먹었다. 고기 한 조각을 100번은 넘게 천천히 씹었다. 평소에 먹지도 않던 돈가스가 왜 그리 먹고 싶던지! 배는 금방 불렀지만 명치가 아프지는 않았다. 명치를 다스리는 데 그 전날 조카의 미역국이 한 몫했기 때문이다. 환자용 냉장고에 넣어둔 미역국 국물을 동치미라 생각하고 시원하게 마셔보면 어떨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입에 댈 엄두도 안 났기에. 신기하게 속이 좀 편해졌다. 수술 후 현경네가 끓여준 소고기죽과 시누이 바바라가 안남미 쌀을 넣고 끓였다는 슈퍼 파워 수프도 큰 도움이 되었다. 미안하게도 바바라의 수프는 딱 한 번만 먹었다. 흔히 그렇듯 건강한 것도 입에 안 맞을 때가 있으니까.
독일 병원은 환자용 회복식이라는 개념이 없어 보인다. 아침은 빵. 저녁은 빵과 햄/치즈/살라미. 운이 좋으면 수프가 같이 나오기도 한다. 점심은 매일 따뜻한 음식이 나온다. 병원식임을 감안해도 맛있어 보인다. 나도 먹고 싶다. 그러면 뭐하나. 그림의 떡인걸. 익힌 야채와 부드러운 파스타는 조금씩 먹고 있다. 감자는 숟가락으로 잘게 으깨서 소스에 묻혀서 먹고, 부드러운 생선은 정말 맛있게 먹었다. 닭다리는 아예 손도 못 댔고, 오늘 점심에 나온 파에야는 티스푼으로 조금씩떠먹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생샐러드도 먹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에는 부드럽게 잘 익은 독일배도 하나 먹었다. 샐러드도 과일도 예전처럼 위가 아프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았던 건 조카가 보내준 노란 호박죽!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일편단심 호박죽 마니아라서. 그래서 또 부탁해놨다. 조카가 뮌헨에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2020년이 지났다. 어젯밤 자정에는 보신각 종소리 대신 멀리서 들려오는 폭죽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소변줄을 뗀 이후 통증은 없었고 화장실도 잘 다니고 있다. 밤에도 2~3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을 가느라 숙면을 취하지는 못한다. 수술 부위도특별히 통증은 없다. 다리 부기는 조금씩 빠지는 것 같은데 금방 나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유튜브로 림프절 마사지를 검색해 따라 해 보라고 내 친구 M이 조언해 주었다. 암 요양원에서 일하는 M이 암에 제일 중요한 건 산소와 열이라고 했는데 암 관련 책을 읽고 공부할수록 동의하게 된다. 다시 2021년이 되었다. 연말에 수술을 받길 잘했다. 새해에는 자고로 희망찬 소식을 전해야 한다. 빨리 회복해서 많이 걷고, 잘 먹고, 자주 웃고, 건강해지겠다. 언젠가 한국에 가서 맛있는 거 실컷 먹고 돌아오는 게 나의 소박한 신년 소원이다.
시어머니의 욕실 가운/실내화/시누이가 보내준 잠옷(위) 2021.1.1에도 해가 났다!(아래)